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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작성일 : 18-08-11 10:52
공관복음서를 읽고나서 - 김영균 집사님의 독후감
 글쓴이 : 배상필
조회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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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를 읽고나서.......

언덕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서 말씀읽기에 참여한 지도 어언 두 달이 지났다.  
마태복음 중반부에서부터 참여한 나는 기특하게도 지금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말씀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 (내 일생에 이렇게 성실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이 때문에 사람이 되어 가는지, 언덕 때문에 사람이 되어 가는지, 읽고 있는 말씀 때문에 사람이 되어가는지는 여전히 헷갈리다.) 
어느덧 우리는 누가복음까지의 공관복음을 마치고 이제는 요한복음서에 접어들었다.  
요한복음과는 관점이 다르지만 셋이서는 관점이 같아서 하나로 묶였다는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  

새로운 관점의 복음서로 나아가기 전에 지금까지 읽어왔던 공관복음의 주요 관점이나 중심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정도는 알고 넘어가야 할텐데 자문해 보면 쉽게 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 말씀이 진짜 어려운 탓도 있다. 문맥도 어렵지만 실천은 거의 불가능한 별세계 이야기같아서... 
그런데 진짜 스스로가 기특하다. 난생 처음같이 복습도 하고 있다.   
복습하려해봤자 (아마도 나이 때문에도 더더우기) 더 나빠진 기억력 탓에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칠 수는 있겠지만 나 자신과 언덕교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관복음을 읽은 느낌을 정리해 본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얼마 안되어 회당에 들어가신 일이 있다. 그리고 성경을 찾아 손수 펼치어 읽어 주신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절의 말씀이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사야서의 말씀과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비전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말씀을 찾아 읽어주신 것이 아닐까한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억압된 자, 슬픈 자. 
공관복음의 중심 축은 어찌보면 예수님 자신이 아니었다. 주변부의 사람들. 근대가 말하는 ‘타자’였다.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는 단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체 측에 끼지 못하는 ‘주변부의 사람들’ 을 말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읽히는 예수님은 ‘타자’의 삶을 돕고,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며 삶의 순간들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은 타자와 일체를 이루었고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분이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 : 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저희가 언제 주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 35~40)  
 
더 나아가 예수님은 타자와 따로 떼어 존재할 수 없는 분이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아니하였고...... 저희가 언제 안 주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마 : 25 : 42~45) 
 
하나님 나라도 타자인 것 자체로 입장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갔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거나 선한 일을 했다거나 하는 어떤 전제도 붙지 않았다. 거지였던 것 자체가 자격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하는 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어린 소자(타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우는 것이 나으리라고도 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는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의 중심에는 ‘타자’가 있다. 그리고 예수의 뜻을 따라 타자를 돕고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실제로 지면의 반 이상이 예수께서 타자들의 병을 치유하고 마음이 아픈데를 위로하고 죄의식으로부터 억눌린 것을 해방하여 주고....자신이 사역 초기에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서 말씀을 이루는 데 할애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9: 35)  
타자와 연결고리없이는 구원도 천국도 없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역사를 보면 타자는 늘 억압받는다. 주체들에 의해 모함받고 마녀가 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어찌보면 공관복음의 예수님도 타자의 대표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거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예수가 죽음으로 끝이 나면 타자에게는 영원한 절망이 선고되고 타자가 중심된 하나님 나라도 설계도만 완성한 채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야 했다. 반드시 부활하셨어야 했다.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타자의 부활’의 또 다른 이름 외에 다른 게 아닐 수도 있다.  
 
 
 
예수가 가장 많이, 그리고 가까이 하며 자신과 일체의 개념을 두고 산 대상들이 ‘타자’라면 예수가 가장 많이 꾼 꿈은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앞서 말한 대로 ‘타자와 타자를 돌본 사람들의 나라’다. 
예수님은 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신 것이 공관복음에서 읽힌다.  
 
첫째는 법 정신이다. 세상의 법과 달리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곱 번 씩 일흔 번 내게 죄지은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고 새로운 법 정신을 선포하신다.  
 
둘째는 경제 체계다. 아침 아홉시부터 아홉시간을 일한 사람과 오후 다섯시부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같은 임금을 지급하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경제 체계를 소개하신다. 그 이론은 간단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도 아침 아홉시부터 일할 기회를 얻었으면 그때부터 일했을 거라는 거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은 아침 아홉시부터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 그가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침 아홉시부터 일한 사람도 그 기회를 얻은 것은 그가 더 선했기 때문이 아니다.  
즉 도덕적 유무와 상관없이 주어진 기회로 인해 차별이 만들어지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지하게 진보적인 경제체계다. 이는 불의한 청지기로 인해 사람들에게 빌려 준 빚이 대폭 감소된 부자 주인의 비유에서 더 심화된다. 부자가 빌려준 돈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불의의 재물’로 언급된다. 나쁜 청지기에 의해 부자는 자기가 빌려준 돈이 대폭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런데 부자는 나쁜 청지기의 행위가 동기가 되어 뭔가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화를 내기는 커녕 나쁜 청지기를 칭찬한다. 자신의 재물이 도덕적 정당성을 넘어선 ‘불의의 재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경제 체계를 깨닫고 받아 들임으로 부자 역시 하나님 나라에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 훗날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사회계약론의 창시자 격인 루소가 예수님이 말씀한 ‘불의의 재물’과 비슷한 개념을 언급하며 사회 정의를 논했다고 주워들은 적이 있다.  
 
정리하면 공관복음에서 읽히는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타자 중심적이었고 타자와 예수님 자신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고 예수님도 타자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지셨고 타자 전체를 대표하여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지배하던 꿈은 ‘하나님 나라’였는데 그것은 타자들이 주인으로 바뀌는 나라였다. 예수님은 공을 들여 그 새로운 세상의 기본 법 정신과 경제 체계를 마련하셨는데 그 법 정신은 무한한 용서와 사랑에 기초하였고 그 경제 체계의 토대는 기존의 소유권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체제전복적이고 급진적인 정의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을 열렬하게, 그리고 목숨을 바쳐 갈구한 철저한 타자로서 생을 사셨고 그 죄로 타자의 대표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꿈을 두고 생을 끝낼 수는 없어 부활하셨다.  
 
어쩌면 나의 이 글을 읽는 언덕교우들은 내가 너무 타자에 치우치는 편협한 시각으로 공관복음서를 읽고 글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글을 읽고 나서 공관복음서를 다시 한 번 죽~ 훑트며 읽어보라고 언덕교우들에게 권면해 보고 싶다. 타자와 하나님 나라를 뺀 공관복음서는 앙꼬없는 찐빵에 불과하리라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언가 하나는 내가 놓칠 수 있다는 스스로의 우려에 다시 한 번 공관복음을 훓터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건져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강조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주변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먹을 것을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하신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고 기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사람을 내버려두겠느냐고 하신다.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찾는대로 찾고 두드리는 대로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어떤가? 이것은 철저히 비현실적인 너무나 무모한 믿음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믿음이 있는 자는 땅의 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일도 땅의 일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만도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다.(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 19, 마 18 : 18) 
 
예수님이 중시하셨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서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단어에 키 포인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는 것 마저도 불경이요 금기였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곳에 계시며 인간과 철저히 분리된 절대적 타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신 친밀한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자신만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더러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마23 : 9)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 비로소 열린 새 ‘하나님 관’이랄 수 있다. 당시의 종교계율에서는 엄청난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신앙을 전격적으로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새 개념이었다. 하나님은 전의 개념에서 죄를 지은 자의 죄를 땅끝까지 찾아 반드시 벌하는 징벌의 하나님이었다. 그 징벌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후손에게까지 물려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불구자나 소경, 선천성 질환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조상의 죄를 물려받고 징벌을 받아 태어났다고 보는 사회적 편견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꾸짖지 않고 따뜻이 맞아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며,  
아버지인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애정 깊은 목자로도 비유된다. 죄인을 탓하고 꾸짖기는커녕 그를 찾아 나서고 껴안으며 그의 따뜻한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죄인이 아니라 죄를 산출하는 (구조적인) ‘악’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공관복음서의 핵심 내용의 정리에 해당한다.  
징벌자이던 하나님을 따뜻한 아버지로 우리에게 소개하신 것 말고는 공관복음을 통해 대하는 예수의 민낯은 거칠고 투박하고 기존의 체제에 익숙한 우리에겐 너무 낯설다. 그리고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생기지 않게 만든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도저히 가질 수 없을 것 같다. 공관복음에서 대하는 순도 높은 예수의 말씀들은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에 기초해 만들어져 우리에게 완전히 익숙해진 교리들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것 같고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도저히 수용 불가해 보인다.  
 
공관복음의 예수님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따로 불러 세워서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타자가 주체와 섞여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앞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내가 주체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 주체의 자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를 부인하고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라고 한다.  
 
나와 언덕교우들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만일에 예수의 말씀과 언행에 가장 가깝다는 공관복음서만 신약성경에 남아 있었다해도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대열에 합류해 있을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던져보며 (처참해진 심정으로) 공관복음 독후감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