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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작성일 : 18-10-08 01:07
사과의 글
 글쓴이 : 김영균
조회 :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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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럽긴 하지만 잘못은 빨리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상책이겠지요.


몇 일 전 성경공부에서 빠지겠다고 한 태도와 관련되어 제가 반성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정말 내 안에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를 읽는 동안 바울에 대한 화가 쌓였고 바울의 원죄설에 기반한 신학이 중세유럽의 국교의 근간이 된 이후, 교회가 권력 그 자체가 되어 하나님을 1,000년의 긴 시간 동안 일반 시민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뜨려 놓았는지에 대한 화가 쌓였습니다.


저를 중세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입장으로 갖다 놓자, 성경을 읽을 권리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루트도 로마교황청 외에는 막혀있던 그 부조리함이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나아가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에 희생당한 개인들의 억울함에 마음이 미치자 그 역사를 살짝 가리우고 바울을 어떻게든 좋게만 보려하는 기독교에 화가 났습니다. 바울이 원죄론만 들고 나오지 않았어도 후에  어거스틴에 의해 더 체계화되어 생기지 않았을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는 모든 개인의 문제에 다 개입하시고 역사하신다고 믿어지는 하나님이 중세 때는 그 긴 세월동안 왜 종교권력의 전횡에 침묵하셨는지를 묻지 않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화가 났습니다. 그 느낌은 마치 일본의 강점이 남긴 아픈 역사를 묵인하고 일본이 남긴 좋은 잔재만 예찬하는 친일적인 그것에 대한 분노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매일 교우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긴 글을 쓰며 바울신학을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을 전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평상시의 제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정도의 저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제가 정말 특별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글을 통해 무언가를, 바울신학이 국교에 편입되면서 왜곡되어 역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오점들과 그 역사에 묻혀버린 수백 수천만의 개인들의 억울함에 화가 나 있는데 교우들은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자 일종의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오늘날에도 바울의 신학에 근거한 교리가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가리우고 있는 것 같구요. 그냥 그게 다입니다. 자괴감때문에 말씀 읽기를 쉬겠다고 충동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 보니 로 인한 행동은 어쨌든 신중하지 못했으며 영문도 모르는 교우들, 특히 최소한 저의 서툰 열정을 밉게만 보지는 않았던 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의 글을 남깁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바울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다음은 오늘 신학토론에서 제가 바울에 대해서 제기한 의문입니다. 저의 를 조금이라도 변명하고 싶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환상처럼 예수님을 만났을 뿐이다.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얘기도 없다. 도리어 제자들은 바울과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그 많은 서신을 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적이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 거의 몰랐기 때문일거다. 그런데 그가 예수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것을 썼다. 어쩌면 바울은 예수라는 소재에 자기의 생각을 조각한 것이 아닐까? 바울의 원죄설은 중세에 걸쳐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 핍박의 뿌리가 되었다. 게다가 오늘의 기독교에 있어서 그가 쓴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의 수많은 가르침보다 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바울의 이야기에 동의하면 영생하고 바울의 이야기를 거부하면 영원히 멸망한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은 많이 달라보인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던 하나님 나라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계승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인다. 예수님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차원으로서의 구원의 개념을 바울은 철저하게 개인의 믿음의 문제로 축소 또는 왜곡 시켜 버렸다. 최소한 한국 기독교를 통해서 읽히는 바울은 그렇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통탄하실 만한 일일 것 같다. 예수님은 죄인 아니다는 것부터 그의 구원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바울은 예수님이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 원죄의 개념을 들고나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부터 그의 구원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님과 바울이 많이 다른데도 우리는 왜 바울의 신학을 예수님 자신의 말씀보다 더 절대적인 진리로 믿을까?"


김영균 18-10-08 08:41
 
여기서 우리라 함은 언덕교우들을 말함이 아니라 보편적인 기독교인들을 말합입니다. 그리고 바울 신학의 전면 부정이 아니라 그의 신학을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로 보자는 뜻입니다. 바울신학의 좋은 점과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역사에 오용되어 미친 해악을 둘다 충분히 살피고 고려하면서...
원죄론은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납니다.
배상필 18-10-08 17:53
 
집사님의 성경에 대한 열정을 존경합니다. 저도 많은 부분 집사님의 생각에 공감을 합니다. 바울신학의 개인주의와 내세중심주의가 특히 한국 교회의 병폐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저도 바울의 메시지보다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가 왜 이렇게 다를까에 대해서는 아직 납득이 되지 않지만,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두 가지 메시지를 통합해서 보는 입장도 있는 것 같은데 아직은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더 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의 메시지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바울의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잘못 해석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에 대해서 전통적으로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한 책이고, 이것에 대한 상세한 교리서이고 그 정점을 로마서의 8장으로 보는데, 최근 40-50년의 세계신약학계의 경향은 개인의 구원 보다는 집단의 구원(유대인과 이방인 전체)을 강조한다고 해석을 하고, 로마서 8장이 아니라 9-11장을 로마서의 핵심으로 본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저도 캐나다에 가서 진보적인 신학을 접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의 차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성경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었지만요. 일반 교우분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이것을 알아내고, 바울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갖기는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김영균 집사님처럼 성경에 특별한 열정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데 모두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구요. 나름대로 집사님의 글에 대해서 반응이 별로 없는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

집사님이나 저나 성경의 세세한 내용이 하나님을 믿는데 중요한 사람들은 납득이 안되는 부분을 계속 파야 하구요.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이런 말을 했더라구요.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대로 쉽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알아가야겠죠~~
김영균 18-10-09 00:20
 
과찬이시구요. 저는 언덕에서  가방끈도 제일 짧고 뭘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다 주제넘은 얘기란 걸 전제로 깔고 가야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종교는 시와 환상으로 영적인 세계에 집을 짓고, 이성으로 허술한데를 손보는 작업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성적인 논리 속에서 보다는, 언어와 개념이 자유로이 널뛰며 조합되는 시의 언어와, 서로 다른  차원들이 뒤섞이는 환상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집은 아름다운 집이지만 로직을 따라 지어진 집이 아니기에 중간중간 이성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꼴같지 않아져서 해체의 위기까지 갈 수도 있는거죠. 오늘의 기독교가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주제넘은 소리를 해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꿈으로 가득찬 복음서에 로직으로 기둥을 세울 필요를 느꼈던 것일까요?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이 그 로직을  기둥이 아니라 완전히 닫힌 틀로 받아들이게 된 걸까요? 동물원 틀 안에 동물을 가둬두듯 하나님을 틀 안에 가둬두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잖아요. 교리가 다름 아닌 그 틀 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틀 안에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억지로 틀 안에 끼워 맞추려하면 여기가 삐져나오고 저기가 뭉그러지고  틀 마저도 기형이 되어 괴물의 형상이 될 뿐인데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만 여전히 아름다워 보이고 외부의 눈에는 정말 믿기 힘든 기형의 괴물!
중셰 교회가 면죄부를 파는 동안
한국 기독교가 불신지옥을 외치는 동안, 외부의 눈에 하나님은 기형의 괴물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시의 언어와 환상으로 꿈꾼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바울은 단지 로직이라는 기둥을 세우려고 했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닫힌 틀로 왜곡을 한건지, 아니면 바울 스스로가 로직으로 닫힌 틀을 만들려고 했는지가 제가 바울서신을 읽어나가면서 추적해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참고되는 말씀 감사드립니다. 배집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저에게도 많은 힘과 의지가 됩니다.
장승희 18-10-21 16:15
 
이런일이 있으셨군요.
저는 요즘 너무 바쁜 일정이라 홈페이지에 못들어온지 좀 됐습니다.
지금 Come Sunday 보면서 짧은 답글 남깁니다.^^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다보면
피드백이 없을 때 느무 답답하게 됩니다.
저는 표현하는 쪽이지만 그렇지 못할때도 많아졌습니다.

저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대할때 어렵기도하구요.

그런것을 통해 저도 돌아보고 제가 무엇을 해야할지
침묵중에 찾기도 합니다.

집사님의 열정에 박슈~! 보냅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