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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일 : 18-10-12 09:34
믿음은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인가? (로마서를 읽고나서)
 글쓴이 : 김영균
조회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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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하면 생각나는 것은 '믿음'이라는 단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새로운 장을 성경의 순서 상 가장 먼저, 그리고 명확하고 집요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들에 의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우리를 구원받은 자로 믿고, 그 믿음에 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해볼 것은 있다. 
믿음은 구원의 완전하고 영원한 답인가? 아니면 믿음 이전의 구원방법(율법)에 대해 단지 상대적으로 진보한,  더 나은 답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본다。

'믿음'은 사도바울이 '율법'의 대안으로 들고나온 개념이다. 회심 후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을 사역의 방향으로 정한 바울은 일단 첫번째 높디높은 난관을 극복해야했다. 그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이방인의 인식 속에도 철저하게 유대인(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다. 유대인들은 수천년 역사 동안 자신들만의 신으로 섬겨온 하나님을 결코 이방인들과 공유할 뜻이 없었고 헬라인들은 다신을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신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을 포기하고 맞바꿔야 하는 유일신이기에  그들의 신의 목록에 여호와 하나님은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이자 민족의 신이기도 한 단군이 일본인에게도 유일한 신이라는 복음을 한국인 들에게도 납득시키고, 일본인들에게 전파해야하는 상황! 이 상황을 한 번 깊이 생각해보고 바울의 난감함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신 만의 하나님으로 굳게 믿고 있는 근거의 핵심은 '율법'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받아온 십계명! 그것을 기초로 수천년 역사 속에  하나 둘 더해져 완성된 유대인들만의 리그 율법! 그리고 자신들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전래
되어 내려온 유대인의 식별표식 할례!

이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도, 이방에 흩어져살고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란걸 설득시킬 수 없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까? 바울의 고민은 깊었다. 

마침내 바울은 좋은 대안을 찾아냈다. 
신 중의 신, 신 위에 신, 그.광엄하신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함으로 그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충분히 챙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그건 지역(local)의 신이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신은 아니지 않는가?

바울은 마침내 유대인의 하나님은 실제로는 온 우주와 온 민족을 다 통치하시고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universal God)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멋진 대안이지만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쉽게 받아들일리 없었다. 이제 바울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하나 뿐이었다. 믿으라고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의 '믿음' 사상이 탄생한 배경이다.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신 분들 중에는 나에게 의문을 던지고 싶은 분이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냥 하나님이 차별없이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걸 믿으라고 하면되지 왜 꼭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했는가? 라는 질문.

이것 역시 유대인들만의 오랜 믿음을 파쇄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고 본다. 하나님이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든 온 세계의 하나님이든 유대인의 생각 속에서 바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를 지불케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이 생각만큼은 쉽게 양보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첫번째,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법정(법문서)에서 죄로 정한 것만 죄로 인정했다. 
둘째, 그렇게 판결받은 죄는 반드시 성경에서 규정한 절차를 따라 피의 속죄를 치루어야 했다. 
그런데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어떻게 하나님이 죄를 묻고 또 성경에서 정한 대속의 제사를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이 질문에 답을 못하면 바울은 한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제 바울이 대답할 차례였다. 첫째,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죄는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바울은 역으로 율법의 허를 찌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완벅하게 지킬 수 았는가? 유대인 너희들이? 천만에. 너희들도 온갖 죄란 죄는 다 지으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유대인 너희들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면 율법을 가지고 자랑할 것은 없는 셈이다. 율법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죄를 드러내어준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서만 죄를 알 수 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마음의 가책이란 것도 있어서 우리의 죄를 고발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대명제가 았다. 율법이 일일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 이전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결국 원죄론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죄를 밝힐 수 있냐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바울이 고안한 개념이었다고 보여진다. 원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이렇게 말하면 율법이라는 법정에 서지 않아도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것이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입장에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의 논리는 한결 그럴듯해졌다. 모든 인간은 율법을 못지켜서도 죄인이고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서도 죄인이다. 예외는 없다. 

이제 하나 남은 것이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정한 대속절차를 따라 속죄제를 드릴 수 없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죄를 사함받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도 묘안을 찾아낸다. 수시로, 또는 정한 절기에 반복해서 드려야하는 동물의 대속을 통한 속죄대신 예수가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 '단 한 번의 완전한 속죄제'라고 말하면 답이 될 것이다. 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니까. 유대인 너희들이 말하는대로 하나님은 피의 속죄제가 없으면 결코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그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피로 속죄제를 치르셨다. 그런데 그 속죄제는 단 한 번이지만 영원한 속죄제다. 왜? 하나님 자신이 대속 제물이 되어 드린 속죄제니까. 
됐다. 이제 됐다. 이제 하나님을 유대인을 넘어선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시대를 종식하고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시대를 열어갈 '선언문'은 완벽하게 준비됐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믿어주는 것이다. '믿음'이다.

이제서야  바울이 좀 보이기 시작한다.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그리고 새로이 창안한 '원죄'라는 개념도 하늘에서 바울에게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념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율법과 대속사상이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꽁꽁 묶어두고 있자 바울은 그들의 위대한 하나님을 온 세계로 개방할 필요를 느끼고 그는 그 선각자의 사명을 감당코자 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종교관념의 토대를 하나하나 꺼내어 언급하면서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토대 하나하나의 허를 찌르면서 각각의 토대에 대해 수정되고 진보된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영원을 내다보고 영원히 전혀 손댈 것이 없는 완벽한 진리이자 구원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논리적 사상가이던 인간 바울 앞에 가로막혔던 높은 장벽을 넘기위한 '신의 한 수'로서 나온 것이자 그의 새로운 사상을 펼치는 첫 발로서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율법은 법정신이 희박하고 자칫 무법천지가 될 수 있었던 고대의 사회를 위해서 주어진 '구원'이었다. 그런데 고대사회에나 구원이 될 수 있었던 율법을 수쳔년동안 신주단지를 모시듯 변함없이 모신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약이 아니라 썩어서 똥이 되고 독이 되었다. 예수님도 수없이 그 문제를 지적했고 율법주의와 싸우셨다.
마침내 바울에 와서는 율법을 대체할 새로운 구원의 대안이 탄생된다. 해묵은 구원의 새로운 대안 '믿음'은 유대인에게만 포박되어있던 하나님을 해방하여 온 세계의 좋으신 하나님'으로 선포할 수 있는 위대한 전기를 마련한다. 바울은 더 좋은 새 시대를 연 공로자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수백수천년이 지나도록 '믿음'만 붙들고 있으면 과거의 율법처럼 '믿음'이라고 똥이 되고 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세계의 사상가들은 '신은 죽었다'고 조롱하며 종교의 종말을 고했고 세계는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듯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종교가 다시 부활하는 지금 원리주의적인 종교에 기반한 테레리즘이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하고 있다. 신은 그들만의 신이라는 것! 기독교도 어딘가 그들을 닮아있는데가 있지 않은가? 

종교는 부활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이런 독단적인 종교를 외면한다. 절대적이고 좁혀진 믿음보다는 보편적이고 열려있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동양의 종교가 서양사회로도 번지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오직 '믿음'만을 고수할 것인가?
세계의 미래를 예측하는 지성들이  "종교는 부활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라고 경고장를 보내고 있는데도...

우리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영원대대로 universal God으로 지키고 싶다면 오늘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으로 제시하고 계신지를 찾아낼 때가 된 것 같다.
--새 술은 새 부대에!!! ㅡㅡ
현대라는 새 부대는 새 술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