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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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작성일 : 18-12-27 12:09
잠시 쉬고자 합니다 1.
 글쓴이 : 김영균
조회 :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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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기점으로 정들었던 언덕을 떠날 결심을 굳히고 운영위원장님을 비롯한 몇 몇 분께 마음을 전달드렸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수년에 걸친 오랜 고민의 결과이기에 마음을 다잡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돈네코 모임에서 4월 달에 청도 방문을 논의하셨다고 하더군요. 조용히 떠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의 의사와 떠나려고 하는 명분을 명확히 교우 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그 동안의 교분에 대한 도리이자 더 깔끔한 정리인 것 같아 아래와 같이 저 다운 긴 글을 적어 올립니다.


 저는 교회를 다녀서는 안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믿음반대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반대가 아니라, 예수님과 바울이 율법을 바라보던 눈으로 저는 믿음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예수님에게 율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때묻어 오염되어 원래의 정신이 상실되어 버린 법! 이렇게 율법을 평가절하하는 예수님에 대해 율법주의자들이 악감정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모순적으로 보이는 점은 예수님은 늘 율법주의자들과 싸우셨지만 동시에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내세워 율법을 부인하지 않고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의 원래 정신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준 거겠죠.


바울은 반율법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창안해냈는데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바울의 믿음은 본인들에게는 율법의 원 정신에서 출발하고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인 반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의 완성은 커녕 철저하게 반 율법적으로 보일만큼 체제전복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 VS ‘사랑 & 믿음간에, 조항 하나하나마다 부딪히는 것도 수없이 많았을테지만 가장 크게는 사랑과 믿음은 둘 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외부로 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로마사람이나 그리스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행하지 않고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니오. 이것은 우리 시대로 비유하자면 믿음과 전혀 상관없이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선포보다 유대인들에게는 더 파격적이고 성립 불가능한 도발적 이데올로기였을 겁니다.

 

어쨌든 2,000년 전에 바울이 선포한 믿음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고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온 인류를 위한 복음으로서의 새로운 신학사상이었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개방적 신학사상이던 믿음을 다시 타 종교와 구별하고 믿지 않는 자와 구별하기 위한 제2의 율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다시 세계와 타 종교에 대해 빗장을 닫아 걸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은 믿는 자 안에만 있다고 주장하면서 제2의 이스라엘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굳게 믿고 율법과 이스라엘 안에만 하나님이 있다고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습니까?

2,000년 전의 믿음은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이었는데 지금 기독교의 믿음은 기독교 밖의 세계를 향한 저주로 변한 거나 다름없죠.


이런 오류와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 안의 한 역사적 지점의 사건의 의미나 성경의 한 구절의 의미에 몰두하기보다는, 성서 전체에 면면이 걸쳐 내려오는 일관된 어떤 정신을 포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곧 성서 안에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몇 번의 획을 그으면서 뚜렷이 진보하고 있는 어떤 실체를 포착할 수 있는 데 그것은 인간의 지위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정말 희생제물을 필요로 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죄없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좀 어이없게 보이는 일이지만 이 동물에 의한 대속제의 충분한 의미는 그것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것에서 진보한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해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물에 의한 대속제는 수천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인간의 지위와 존엄을 파격적으로 새로 해석하는 일대의 사건이었음이 틀림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또 어떤가요?

율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가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조항은 하나님의 질투를 보여주는, 하나님 중심적인 대표적인 법조항 인가요?

아니요. 바로 다른 신들은 인간을 제물로 요구하기도 하고 황금과 쾌락만 탐하던 신들이었기 때문에 나쁜 신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그 조항을 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 조항 때문에 우리가 불교나 천주교 등 훌륭한 종교와도 담을 쌓고 지낸다면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와 함께하는 자라던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유만 있으면, 권력만 있으면 사람을 죽여도 큰 문제가 되지 않던 고대의 시대에 주어진 살인하지 말라‘,’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계율은 인간이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파격적인 인권의 진보를 이룬 한 획이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것은 멋지고 그럴듯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그것이 창안된 시대로 보면 오랜 과거동안 누적되어온 적폐를 한방에 뚫고 물리치는 혁명적이고 혁신적인 새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모두 사형 당하게 할 만큼 혁명적인 이데올로기였죠. 예수님의 사랑안에서는 인간 개개인이, 그리고 바울의 믿음안에서는 인류 모두가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재정의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대신 동물의 제사부터 율법을 거쳐 예수님의 사랑과 바울의 믿음까지....이 각각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이 변덕장이라서 인간제물을 필요로 하다가 동물제물로 바꾸고 유대인만 사랑하다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건가요?

성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변화해 온 것을 알려주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인가요?

 

제가 보기에 성경의 역사는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인간 스스로의 인식이 서서히 진보되는 과정의 서술입니다. 예수님 때에 와서는 마침내 신 안에 내가, 내 안에 신이 있는,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고, 고전적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경도 그런 불경이 없는 파격적인 위치까지 인간의 지위가 상승되죠.

이 진보적 사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는 지위의 향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좀 더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눈 먼 사랑이라고 할까요?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인간을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사랑하기에 마땅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을...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깨닫는 데는 수천년의 세월과 수많은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오늘 날에....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예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설교하는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몸을 바쳐 원래의 자리에 앉힌 인간의 지위를 다시 수천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아쉬운게 없다니까요. 우리에게 뭘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우리 인간들이 잘 되고 잘 살기를 바랄 뿐이죠. 우리 육신의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향하여 그런 마음을 가졌건만 완전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하물며 어떠하실까요?

 

 

이게 다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왜곡된 믿음은 우리 시대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문제를 가진 당사자와 하나님 둘 사이의 일로 보게 만듭니다. 문제를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개인이나 단위 별로 매달려 그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들의 대학입학을 위해서 기도하는 어느 어머니는 다른 어떤 아들의 낙방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와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는 제로섬 공식을 우리는 알고 있죠. 하나님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무언가를 주면 다른 어느 편에서 무언가를 빼앗는 셈이 되는 제로섬 게임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구조가 악하고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제로섬 구조에서 하나님이 어느 한 편에 응답하면 하나님은 그 즉시 공의의 하나님임을 포기하게 되는거죠.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하기에 앞서서 잘못된 입시구조와 학력 중심의 사회를 너희들이 먼저 고쳐라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간증은 제로섬에 해당되는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죠.

이번에는 더 거창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이 기후협약을 탈퇴하고나서 미국의 교회들이 깨끗한 공기를 위해 믿음의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들 전지구적인 기후 문제가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반대로 뒤집어 지금 유럽사회를 공포 속에 몰아 넣는 테러의 위협은 유럽인들이 믿음을 버리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요? 개인들마다 믿음으로 응답받는다는 간증이 넘쳐나는데 그 믿음이 우리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왜 효력이 거의 없을까요?

 

꽤 괜찮은 기독교인들이 믿음만큼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하나 더 있죠. 경건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의미로서 연상되는 (왜곡된) 경건은 또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기독교의 (왜곡된) 믿음과 경건은 자기 자신만 하나님께 미쁘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경건함이 있으면 우리의 믿음과 경건함을 미쁘게 보아주시는 하나님이 친히 손을 들어 세계에 대해 어떤 일이든 하실 거라구요. 세상이 악한 거는 나와 상관없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악한 이 세상의 종말은 이미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구요. 우리는 차라리 이 세상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권능으로 새로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 낫다구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세상에 대한 마음과 관련을 과감히 끊고 노아의 방주같은 교회에 머물면서 비록 많지는 않더라도 몇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여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라구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우리라 함은 언덕교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로 돌아가면 기독교인의 90프로를 일괄해서 지칭하는 말이고 지금으로보더라도 60~70프로의 기독교인을 대변해서 지칭하는 말입니다. 과연 이게 진정한 기독교인가요?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세상을 구원할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는데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방관자적으로 바라보면서 나 자신만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 있으면 다인가요?

 

이 모든 기독 스토리의 중심에 왜곡된 믿음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왜 예수가 될 수 없고 바울이 될 수 없나요? 사람 안에 성령이 임하면 그게 예수고 바울 아닌가요? 왜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말씀을 예수님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이 시대를 위해 전파할 수 없을까요?

 

예수님의 새로운 혁신 사상 사랑과 바울의 새로운 혁신 사상 믿음은 그 전대의 율법의 원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임을 두 분 다 분명히 하셨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계승은 커녕 율법을 파괴하고 율법을 상대로 선전포고와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였을까요?

예수님과 바울은 율법의 원 정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궤뚫어보고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 정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제가 믿음의 반대자를 자처하고 나선 동기도 같습니다. 지금 교회들이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지 말고 믿음이라는 새로운 신학사상이 탄생했던 2,000년 전의 배경과 원래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의미는 한편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간 지위의 주체적이고 변화된 인식이며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이 혈통과 피부색과 종교유무를 떠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데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성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경배하는 것보다, 인간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숨결을 품은 존엄한 존재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