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가장 힘없고 돈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와 똑같이 나에 의해서도, 타인에 의해서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거요. 곧 타인이 누구냐고 올바로 정의하는 것을 하나님이 누구냐고 올바로 정의하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시하는 것이 성서의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을 잃어버리면 거기서부터 출발한 타인의 지위도 같이 흔들리고 왜곡돼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더러 자신을 공경하고 자신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고 자기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장! 인간을 위해서.....
이와 같은 근거로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신적인 힘으로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힘없는 인간의 손들이 모여 세상을 고치자는 것으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계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들, 보이지 않게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개인의 선한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대한 악의 실체는 개인의 믿음과 경건’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힘 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믿음’이라는 담을 철거하고 다른 종교와 세상의 좋은 무브먼트와 손을 잡고 연대하며 힘을 키워 나아가야하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의 믿음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복음이기는 커녕 철거대상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사랑과 바울의 믿음이 당시에 ‘모든 인간’에게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주고자 새로이 높이 든 혁명의 기치와 같은 거였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받아야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지금 온 인류를 종말로 몰고가는 대부분의 큰 문제들은 전과 달리 전지구적 문제들입니다. 자연계에서는 기후변화가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이고 우리가 숨쉬는 공기의 질은 방독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수준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구 공동체에는 건전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되면서 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여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패자의 반열에 들지 않기 위해 부자들과 기득권들이 남겨 놓은 한정된 기회들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위협도 빼놓을 수 없겠죠. 이런 세계를 향해 교회 안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인가요? 교회 안은 뭐가 다른데요. 누가 그에게 빵을 줍니까? 의료비를 줍니까? 학자금을 줍니까? 하나님의 위로요? 그것은 빵과 의료비와 학자금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남에게 할 수 있는 말이죠.
그렇다고 사도교회처럼 재산을 다 팔아 교회에 바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리어 지금 셰계가 갖고 있는 문제는 내 재산을 다 팔아 구제기관에 헌납해도 바닷가의 모래 한 알을 움직인 효과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거죠. 그걸로 세계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요?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새로이 주시는 ‘복음’이 될겁니다. 그 복음의 새 노래는 어떤 가사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전지구적인(global) 차원의 문제인만큼 그 노래 가사는 “We are the world. We are the one”부터 시작해야 할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과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기독교와 불교가, 그리고 이슬람교가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출발점에 같이 서지 못한다면 이 전지구적인 문제가 해결될 다른 방안이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율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율법을 부수고라도 넘어가야 했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 믿음이 걸림돌이 된다면 믿음을 깨부수고라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죠. 개방과 통합이 필요한 시대에 오늘날 기독교의 믿음은 도리어 세상과 장벽을 쌓는데 나쁜 기여를 하고 있으니 그 믿음이 더 이상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기독교는 원래 Good news의 종교인데 그렇다면 복음의 종교답게 우리는 오늘의 세상이 필요로하는 Good News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bad news만 가득찬 이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 혁신적인 Good News는 뭘까요? 사실은 대부분의 혁신이라는 것은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장은 인간이라는 것! 하나님에게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할 수 없고 이 지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심장인 인간을, 종말로 내몰린 이 세계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우리 또한 모든 담을 허물고 세계의식을 갖고 교회 바깥과 기꺼이 연대하며 좋은 방법을 찾아주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것!
저는 어렴풋이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 이야기를 새로 써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바울의 original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것 뿐인데 ‘새로’라는 단어를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요.
여기까지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저는 믿음 반대자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믿음을 중심으로 세워진 곳이고 믿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곳이잖아요. 언덕은 보편적인 다른 교회들보다 자유롭고 깨끗한 교회지만 언덕 역시 전통적인 믿음을 중시하는 곳이잖아요.
저는 저의 새로운 믿음에 대해서, 모아보면 얇은 책 한 권 분량 이상의 글을 언덕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카톡에 올렸지만 언덕교우들에게는 그저 낯선 이야기였던 것을 느꼈습니다. 원래부터 저와 관점이 비슷한 한 두 분을 제외하고는 저의 관점에 동의한다는 분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주로 열정에 감복한다는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죠. 제가 바랬던 것은 저에게 좋은 얘기를 해주시는 것이나 저의 열정에 감복하는 것이 아니라 언덕이 하나님과 성서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은 바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새 부대에 담을 새 포도주를 찾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좀 지쳤네요.
최근 언덕을 떠날 마음을 굳혔었지만 선배되는 몇 몇 분들의 집요한 권고를 받아들여 몇 달 쉬면서 저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그 움직임을 따르고 싶다는 정도로 한 발은 물러서고자 합니다. 반면 언덕교회와 교우들도 저 같은 사람을 계속 언덕에 있게 해서 유익할 것이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돈네코 4월 청도여행은 제가 보이콧해야 할 상황이네요. ㅎㅎ.
크고 작은 짐을 끈덕지게 지고 교회를 섬기며 수고하는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표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쉬는 동안 개인적인 접촉과 연락은 저에게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아서 사절하오니 제 뜻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연말에 교우분들께 별로 힘 안되는 얘기와 개인의 입장을 말씀드려서 송구합니다.
긴 글이라 에둘러 가면 더 길고 지루한 글이 될 것 같아 무례함을 무릎쓰고 단정적으로, 설교 조로 글을 쓴 것에 대해서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