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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작성일 : 19-02-17 20:12
창세기 다시 읽기
 글쓴이 : 김영균
조회 : 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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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읽기가 시작되었네요.
언덕을 떠나 있는 입장이지만 10년을 있었던 애정 또는 최소한의 자격으로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는 두가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신'을 주인공으로 읽는 관점이죠. 인간을 만들어 에덴동산 안에서 일도 안하고 잘 먹고 잘살게 해줬더니 어느날 자신이 넘지말라고 한 울타리를 넘어선 인간. 그걸 괘씸하게 생각해서 분노하고 영벌을 선포하는 신.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런 관점 하에서의 신은 '신'답지 않고 그냥 보통 사람 같아요. 비유하자면 애완견을 따뜻한 거실에 살게하면서 먹을 거를 여기저기 놓아두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외롭지 말라고 쌍으로 키웠더니 어느날 이 애완견들이 결코 건들어서는 안된다했던 주인 밥상의 음식까지 건든거에요. 주인은 열이 받았죠. 애완견들을 거실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먹을 것도 돌아다니며 스스로 찾아 주워먹으라고 벌을 내렸어요. 바로 에덴동산 이야기죠. 여기서  신은 애완견을 기르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죠.. 그래요.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신과 애완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신은 전혀 신답지 않고 그냥 인간 같고, 인간은 전혀 인간답지 않고 애완견 같죠. 원시시대에 인간이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일 때의 상태를 에덴동산은 비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신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동물이 아니지만 명료한 자의식을 갖지도 못해서 아직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는 중간적 존재!
인간이 격어온 진화의 어느 시점을 설화로서 비유하고 있는 거겠죠.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 아니라 의미를 담은 설화!
그런데 기독교는 이 설화를 사실로 간주하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원죄로 규정하고 모든 인간이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부터 교리를 펼쳐나갑니다.

교리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탈 에덴동산 이야기는 신 앞에 (자의식을 갖추지 못한) 애완인간 같던 원시적 인간이 어느날 의식 속에 금기되어 있던 내용에 의문을 갖고 그 구속을  깨뜨리고 자기 자신의 행보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진화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설화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주 고대의 인간들은 감기가 걸려도, 비가 안와도, 동료가 사자한테 잡혀먹혀도 모든 것을 신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식했을테고 그만큼 신에게만 촉각이 곤두서 있었겠죠. 신이 전적인 결정권을 가졌다고 믿은 만큼 신이 인간 의식의 전적인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신의 눈치만 살피며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거죠. 에덴동산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이죠. 그런데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자의식이 발달하면서 신의 전적인 결정권과 구속력에 의문을 갖게 된 거죠. 과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신으로 인해서  일어나는걸까? 마침내 인간은 죽음을 각오하고 실험해 보게 됩니다. 결과는 뜻밖이었죠. '죽으리라'던 신의 얘기와 다르게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거죠. 웬지모를 두려움과 죄책감까지 떨쳐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에요. 

에덴동산을 벗어나서야 자신들의 발가벗은 몸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는 인간이 신에게 전적으로 구속되어 있던 애완인간적 의식상태를 벗어나고서야 '자기를 의식할 수 있는 진짜 인간'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래요. 창세기는 신에 의해 철저히 구속되어 있던 애완인간이 자의식을 갖춘 독자적 인간이 된 순간을 에덴동산의 설화를 빌어 드러내고 그 때부터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됨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인식되는 세계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책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요....


신이 마치 인간처럼 자신이 기르던 애완인간에게 실망하고 화나서 징벌을 내린다는 신 중심의 전통적 이야기와 인간이 신에게 전적으로 구속되어 있다가 일정부분 벗어나서 자의식을 갖추면서부터 비로소 인간으로 진화되어가는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더 에덴동산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여전히 에덴동산을 그리워합니다. 에덴동산을 낙원처럼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유토피아로 꿈꾸기도 하죠. 우리더러 다시 애완인간이 되라구요? 저는 절대 NO입니다.

신이 정해준 운명이 있다는 생각과 '나의 삶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창세기에서도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일찌감치 계속 충돌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까요?
우리 운명의 주인이 신이라는 것?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겠죠.
제가 보기에는 반대입니다.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증명돼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났을 때 신은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갈고 수고하며 그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고 살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결정지어준 운명대로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려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신에게 바쳤습니다.  아벨은 건방지게 땅을 경작하고 살아아 한다는 신에 의해 결정된 운명을 거부하고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었고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명백히 신에 의해 결정된 운명을 거부한 셈이죠. 그런데 신이, 운명에 순응한 가인이 아니라 운명을 거역한 아벨의 제사를 수납하고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문학을 이미 창세기에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또 어떻구요? 경계지어지고 운명지워진 부모친척 아비집을 떠나 밖으로, 또 밖으로 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또 어떤가요? 하나님에게 순응하기는 커녕 하나님과 밤새도록 맞짱 뜬 야곱을 하나님이 축복하고 있어요.
아브라함도 야곱도 하나님을 얘기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일탈에 분노하던 그 신과는 완전히 다른 신입니다. 종속된 인간이 아니라 주체자 인간으로서 더 넓혀진 의식의 지평에 새로이 출몰하는 더 높은 차원의 신을 만나고 옛신을 버리는  주체적 인간의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는거죠.

먼 훗날, 예수는 마침내 인간과 신은 거의 동격이다라고까지 선포를 하게 돼죠. 결국 구약부터 시작해서 예수에게 이어지는 성서의 역사는 인간의 자기발견의 진보적 역사에 다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신을 다시 억압과 제약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퇴보도 곁들여 있지만 종내는 그런 구시대적 신의식으로부터 탈출과 해방을 재촉하는 선지자의 목소리가 드높아지다가 결국 예수에 이르러 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됨으로써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던 신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구원이 이루어진거죠.  하나님을 외부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 그래서 내과 신가 합일된 주체로서 우뚝서는 것! 예수는 신앙의 경지를 여기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자기 발견을 이끈 위대한 인문적 성찰의 원동력이 보이지 않는 신을 인식할 수 있던 인간의 능력이었다고 성서는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구약을 훓터내려와보면 성서가 보여주는 신의 모습은 인간의 의식이 진보하는 것과 발맞추어 이름만 같은 다른 신으로 진보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적국의 남녀노소까지 남김없이 죽이라던 여호수아서의 신과 반대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예수의 신이 같은 신일 수는 없는거죠. 그런데 어쨋든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의식의 진보를 견인하고, 이 상상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의식을 다듬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 마침내 거듭나게 했다는 것! 결국 성서는 신을 어떤 한가지 모습의 실체로 규정할 수는 없다해도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신과 함께해온 행보를 긍정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이런 관점으로 창세기를 읽을 때 소설을 읽는 이상의 재미와 가장 심오한 인문학서적을 읽는 의미를 곁들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원죄'는 창세기의 주제가 아니죠.
도리어 창세기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고싶은 교훈과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애완인간이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되었다는 인간 진화의  이 멋진 인문학적 비유에 원죄의 도그마를 뒤집어 씌워 인간이 애완인간에서 진짜 인간으로 진보한 의미를 퇴색시키려하다니! 
참 가슴아픈 일입니다.

배상필 19-02-18 16:26
 
김영균 집사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에서 또 집사님의 글을 보니 반갑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에 대한 집사님의 새로운 관점도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1~11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것 같고, 기존에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창세기의 과학적 규명을 위해서 창조과학회도 활발히 활동을 했지만, 요즘에는 복음주의권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면서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이와 관련된 성경 바위 시간이라는 책이 IVP에서 출간이 되었네요(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174856711)

저도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과 전통적인 해석을 진리라고 생각을 했었고 성경에 대해서 한 가지의 해석만 옳다고 생각을 했는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든 생각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원죄론이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는 아담과 하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것이 결혼의 성경적 규범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저의 생각은 대부분은 한 가지 입장을 취하겠지만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모두 확률과 가능성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요.

집사님이 인간의 주체적 삶을 강조하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기독교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에 대해서 저도 동의를 합니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서 집사님과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마음이 열려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생각의 나눔을 통해서 서로 배워가고, 조금씩 진리에 가까워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집사님 다시 한번 환영하구요, 잠시 오프라인에서 쉬시더라도 온라인에서 이렇게 생각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
박창훈 19-02-19 12:36
 
반가운 분의 글을 보니 감사합니다. off-line에서 자주 뵈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