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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작성일 : 19-03-12 23:35
정들었던 언덕을 뒤로하며
 글쓴이 : 김영균
조회 :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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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사람이 뭐 이리 소문내며 요란스럽냐고 나무랄 교우분들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라한 변명 또는 항변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언덕은 개혁교회입니다. 개혁이라는 자체에  실험과 도전이라는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열림성으로 인해 다양한 유형의 종교적 색깔과 심지어 무신론적 종교의 의미를 탐색해 보는 사람마저 몸을 담아 보거나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언덕교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지향하지만 가능하다면 다양성을 수용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본다는 것! 갈등과 실패는 용납될 수 았지만 실험을 멈추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개혁교회의 면모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같이 일반 교회에 가면 단 한 달만에 쫒겨날 사람10년이란 긴 세월을 언덕의 지체로써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쨌든 언덕은 새로운 실험과 갈등과 수용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보여주는 것이 개혁교회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생각을 가진 교우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남아 있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는지..... 그런 작은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것이 개혁을 추구하는 언덕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개혁교회로써 교회사적  족적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떠나면서도 이렇게 요란스럽게, 저의 흔적과 발자취를 언덕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고 싶은 뻔뻔함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언덕의 교우 분들은 제게 친구로 남겠지요. 목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 청년들....

모두 너무 좋은 분들이라서 아마도 개인적인 교류를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한 분 한 분, 따로따로 만나뵈며 친구의 교분을 이어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언덕에 남기고 싶은 글이 있습니다. 6년전 쯤,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신도 설교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교우들과 나눈 내용입니다. 요즈음 홈페이지 성경읽기에서 아브라함을 읽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아브라함 이야기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다시 읽기>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근본주의 신앙에서 출발, 40대 중반까지도 보수 중의 보수인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한 내 삶의 폐해와 부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을 가져서 도움이 되었던 때는 내 정신이 미숙하고 무언가에의 의존이 필요했던 청소년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신앙이 하나의 알의 껍데기처럼 나의 성장과 사유와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꼇습니다.

내 삶에는 근본주의자에게 주입된 종교적 이상과 초라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이 커져갔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만일 내가 어렸을 때부터 주입되고 받아들여져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면 정말 믿기 힘든 신화 같은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도 그 믿음을 놓을 수 없는 분열적 증상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내가 갖고 있는 진실한 고민을 털어 놓으면 내 이름에는 빨간색 줄이 쳐지고 사람들은 색안경을 쓰고 나를 바라볼 것이 틀림없었죠.

세상에, 진리를 추구한다는 교회에서 한 인간의 소박한 진실 조차도 털어 놓을 수 없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가 얼마나 진실에 대해 억압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지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저는 어느 순간 알을 깨고 신앙을 벗어 던졌습니다.

30년간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이 신앙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한국인인 제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신의 비디오 카메라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새로운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특정한 신에 대한 신앙은 벗어 버리게 되었지만 종교 자체를 부정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종교만큼은 유익한 것으로 보고 새롭게 종교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설 것인가?

 

저는 일단 기독교를 진정한 종교로 긍정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과거에 주입되어 있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 다시 말하면 보편 상식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 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성경을 다시 읽어서 성경이 내 삶에 진정으로 유익한 진리같은 것을 담고 있지 않다면 가차없이 집어 던지리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다시 읽어 나가기 시작했을 때 깊은 감동을 준 말씀이 바로 오늘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 담긴 의미들은 저에게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주었고 그 이후의 성경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제가 새롭게 읽은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현대의 진보적 철학 사상은 물론 타 종교의 심도 있는 깨달음과 공유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다 담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가 오랫동안 부모형제와 더불어 살고 있던 하란 땅을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새로운) 신의 음성을 듣고 그 땅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신은 하란의 여러 다른 고착신들은 물론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 바깥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말라던 창세기 초반부의 신의 모습과도 너무나 다른 새로운 신인거죠. 얼마나 다르냐하면 그 신은 아브라함이 잠시도 머물러 있지 못하게 끊임없이 떠나도록 종용합니다. 여기인가 생각하고 자기 영토화를 하면 더 넓은 경계를 얘기해 주시며 아브라함더러 거기로 나아가라고 하고 이제 여기까지겠지 하면 또 더 넓은 경계를 얘기해 주시며 또 나아가라 하십니다. 심지어는 열국의 이름을 들어주며 그것까지 아브라함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침내 만민의 아버지가 되는 꿈을 아브라함에게 주십니다. 현대 철학이 말하는 영토화와 탈영토화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제 포스트 모던 철학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한 말을 한 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탈 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 가라.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탈 영토화를 하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시 받았던 땅은 물리적 땅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게 땅이었다면 그 거대한 땅을 소유했을 아브라함이 왜 자신의 아내 사래가 죽었을 아내를 묻을 땅 한 평이 없어 창세기 23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 나그네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 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에게 좀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표현된 땅은 물리적 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인식의 지평이자 마음의 크기였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은 에덴동산의 신과는 반대로 현대의 포스트모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탈 영토화의 과정을 거듭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아브라함을 지성의 거인, 영적 거인으로 탈바꿈하게끔 이끌어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식의 지평이 온 만민에게 가 닿는 과정까지는 아브라함의 철학적 성찰의 색채가 더 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철학으로 끝나면 성경이 아니겠죠.

마침내 아브라함은 철학이라는 영토마저 넘어서서 또 다른 경지로 탈영토화를 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마지막 이상이 무었이었습니까? 그것은 천하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게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아니라, 내 민족과 내 국가만 아니라 천하만민이....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만민의 아버지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만민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 자기 자신, 자기 자식, 자기 가족, 자기 민족에게만 매여 있어서야 어떻게 진정한 만민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경험을 통해 인식의 지평만 만민의 아버지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 인식과 일치되는 종교적 경지에 도달한 거죠. 이게 바로 철학을 넘어서는 종교의 지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성적 경험을 넘어서는 전인적 경험, 자아 안에서의 철학이 아니라 탈 자아를 통해 더 큰 존재로 거듭나는 신앙의 비밀.

 

두 번째로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는 노자의 무위사상도 담겨있음을 보게 됩니다.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가는 것이고 도는 날로 비워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철학적 성찰을 통해 많은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더해갔지만, 그 결과 자신이 만민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다소 과대망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이상에 부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종교적 깨달음, 노자의 사상으로 비유한다면 종교적 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함이 아니라 비움의 역설을 깨닫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자는 무위사상으로 유명하죠. 솔직히 저도 그 뜻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얼 억지로 하려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아주 엉터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보시자구요.

여러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이상을 가졌던 아브라함이 전쟁과 침략으로 남의 땅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나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사람들을 모아 정치적 행위를 한 적이 있나요?

그는 그의 아내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었을 당시 사람들에게 나는 여러분 들 중에 떠도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이게 여러 민족을 거느리는 이상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고대란 시대에 여러 민족을 거느리는 유일한 방법은 쳐들어가 싸우고 죽이고 항복을 받는 방법 뿐이지 않았습니까? 그와는 너무나 다르게 아브라함의 방법론은 노자의 무위 사상에 가깝게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자신을 비워갈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노자보다 무려 천 몇백년을 앞서 살았던 아브라함이 훗날 노자가 말한 무위의 도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로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불교의 대표적 진리와도 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엇습니다. 고려시대 유명했던 스님 임제는 다음과 같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의 해석을 듣고 나면 그럴 듯 합니다.

부모는 사람의 과거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부처는 사람이 가진 미래의 이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스님이라면 부처가 되는 것이 미래의 이상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둘 다를 죽이라는 건, 사람이 사는 것은 현재 이 순간 뿐인데 과거의 자기에 붙들리거나 미래의 이상에 붙들려 현재의 중요성을 상실하고 살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저는 이 말씀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좀 우스운 얘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중국에서 직원 수십명과 더불어 사업을 하는 사장이기도 한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집에서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도 널 때 가끔 드는 생각이 있어요. 내가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이런 설거지나 하고 있어야 되나?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요.

이런 생각 속에서 지금 내가 설거지 하고 있는 이 소중한 현재를 부정하게 되고 마이너스 인생을 살게 되는 거죠.

설거지 이야기를 더하자면 이럴 때도 있습니다.

어라~어제도 내가 설거지 하고 그제도 내가 설거지 했는 데 오늘 도 이 사람이 설거지 할 생각을 안하네. 그러면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하죠. 과거의 기억이 나를 괴롭히는 겁니다.

이럴 때 과거를 죽이는 종교의 도를 배우면 그저께도 없고 어저께도 없는 겁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만 있는거죠. 나는 지금 이 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건 플러스의 마음, 긍정의 마음으로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으면 됩니다. 생각해 보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종교의 도를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건 임제 스님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부모를 죽인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의 모든 이상이 담긴 이삭을 제단에 바친 건, 임제 스님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부처를 죽인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정리해 보면 저는 3,800년 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철학과 손잡고 가다가 철학이 그 한계로 인해 멈춘 지점에서 종교적 성찰로 인해 껑충 발돋움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찾고자 했던 제게는 자석처럼 저를 성경 쪽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강력한 힘이 되어 줬던 거죠

교회들이 '믿음으로만'을 외치면서 철학과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마음을 가질 때 가방끈 짧은 저도 상식으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귀한 깨달음들을 놓치게 될까 저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중략.....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엇을까요?

그의 내면 안에서 솟구쳐 소용돌이치던 기존의 삶과 신앙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만 발견할 수 있었던 새로운 신, 하나님의 음성도 아브라함에게 들려오지 않았을 겁니다. 묻고 회의하고 떠나고 다시 찾고..... 그런 되풀이의 과정이 아브라함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에덴동산의 하나님도 아니고 틀 안에 머물기를 종용하는 하란의 수많은 어떤 신들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신을 만날 수 있었던 거죠.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면 새로운 신의 이미지를 자기 안에서 그릴 수 있었다고 할까요? 뒤이어지는 출애굽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떠날 때 새로이 만나지는 신, 기존의 틀에, 구획주어진 운명에, 주입되어진 종교에 길들고 순응하지 말고 떠날 것을 종용하는 신.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때 거기서 말하는 믿음이 우리가 말하는 믿음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 믿음은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전래되고 답습되어온 믿음에 대한 굳힘이 아니라 도리어 깨뜨림으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은 에덴동산의 신이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선과 악을 나누고 심판하는 노아 홍수의 신도 아니었죠. 악한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기는 커녕 끌어안고 신원하는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축복하는 신! 그 신이 어떻게 노아 홍수의 신과 같은 신이겠습니까?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신을 만날 수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확정의 언어'가 아니라 '물음의 언어'였다고 할까요? 우리 역시 물음을 멈추는 순간 박제된 믿음만 남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여전히 에덴동산에, 부모친척아비집에, 내가 이미 자기영토화를 한 곳에, 2,000년 전까지 기록된 문자에만 우리 신앙의 터를 뿌리내리면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완전히 새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가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최종원 19-03-14 14:53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새삼 머리를 스치고 가슴을 울립니다. '지금'의 삶이 그리 중요한데, 그 '지금'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없어서 아픕니다. 그 아픔을 주지 않았어도 아픔을 느끼는 사람도 있군요. 그 '깨달음'은 혼자가 아니라 어쩌면 '함께' '오늘'을 만들어가야할 우리의 '깨달음'은 없는 것인가요? 설령 오늘이 지나 어제가 된들, 어제는 오늘이 아니기에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나아가야겠지요... 어찌 우리가 시간을 나눌 수 있으리요. 오늘의 장소가 아니어도, 그대 원하는 장소에서 '친구'로 만나고픈 마음은 봄 개나리 피듯 그렇게 빨리 땅을 뚫고 올라오네요. 머지않아.. 거기서(그 땅)... 친구로...
배상필 19-03-14 15:18
 
김 집사님, 반갑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입니다. 제가 언덕에 정착하는데 김 집사님의 역할이 컸는데, 집사님을 언덕에서 못 뵙게 되어 아쉽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의 성경해석도 저의 생각의 지평을 넗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역시 아쉬운 마음입니다.

언덕의 구성원이 아닐지라도 교회 안이나 밖에서 또 뵈면 좋겠고, 또 이 게시판에 가끔 생각을 나누어 주셔도 좋을 듯 합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과제인데 집사님의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조만간 뵙겠습니다 ^^
손종칠 19-03-16 11:04
 
김 집사님,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리신 글 읽는 내내 그리고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지만,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면서도 기독교적 중심과 체계 속에서 융합시키는 것이 놀라우면서 재밌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언덕에 계셔야 하는데...흑흑...지금처럼 생각나는 것, 공부하는 것 또는 그냥 일상의 소회라도 가끔씩 올려주세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