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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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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27 00:11
[우리말성경]- 고린도전서(1Corinthians) 16장
 글쓴이 : 이경숙
조회 : 127  

16장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헌금

1.  이제 성도를 위한 헌금에 관해서는 내가 갈라디아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2.  매주 첫날에 여러분 각자가 수입에 따라 저축해서 내가 갈 때 헌금하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3.  그러면 내가 도착해서 여러분이 인정한 사람에게 내가 편지를 써 줘서 여러분의 선물예루살렘에 전하게 할 것입니다.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여행 계획

5.  내가 마케도니아를 지날 것인데 그곳을 지난 후에는 여러분에게 갈 것입니다.
6.  혹시 내가 여러분과 함께 머물며 겨울을 보내게 될 것도 같습니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7.  나는 지금 지나는 길에 잠깐 들러서 여러분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8.  그러나 나는 오순절까지 이곳 에베소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9.  이는 내게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큰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0.  디모데가 가면 두려움 없이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돌봐 주십시오. 그도 나처럼 주의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11.  그러므로 아무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며 그를 평안히 보내 줘서 내게 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형제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2.  이제 형제 아볼로에 관해서는 내가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갈 것을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가 지금은 갈 마음이 전혀 없으나 적절한 시기가 오면 가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부탁

13.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남자답게 용감하고 강건하십시오.
14.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15.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의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기는 데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과 또 함께 동역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십시오.
17.  나는 스데바나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합니다. 이는 그들이 여러분을 대신해 내 허전함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18.  그들은 나와 여러분의 영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인정해 주십시오.

마지막 인사

19.  아시아교회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아굴라브리스길라가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주 안에서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합니다.
20.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21.  나 바울은 친필로 안부를 전합니다.
22.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사랑을 여러분 모두에게 보냅니다.   [출처: GOODTV 성경읽기]


김영균 18-10-27 06:20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곳, 교회

우리의 삶과 생활이 교회 중심적이 될 때 좋은 것도 있겠지만 문제는 개인의 축소가 불가피해
진다는 겁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한 바울에게서 예수님보다 사람냄새가 덜 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곳곳마다 마주치는 개인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구체적으로
담겨있는 반면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를 위해 봉사한 개인들의 이름만이 언급됩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은 집단의 윤리(율법)으로부터 개인의 삶을 되찾아주는 것을 중요한 구원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집단의 강령이나 규율에 묻혀있던 개인을 늘 찾아 꺼내어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시키셨죠. 바울에게는 집단(교회)의 목적에 개인들이 묻히고 부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임박한 재림을 믿던 바울과 그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는 정황 상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삶'을 어떤 정황에도 양보하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
바울과는 많이 달라보이고 예수님과는 몹시 같아보입니다.
     
박경옥 18-10-28 07:40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복음'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것 또한 예수님의 건강한 긴장과 역설과 아이러니한 가르침 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와 같은 고통과 유혹을 겪으시면서 같은 세상을 숨쉬고 살아가신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대상이 되신 그리스도, 겸손의 예수와 영광의 예수 사이의 긴장, 어정쩡함, 애매함, 불편하기까지한 역설, 아이러니 모두를 품으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가르침은 바울신학 전체와 긴밀히 상응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부활 이후의ㅇ 교회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하여 하셨던 약속, 즉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부요함 속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또는 자녀들)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그의 대속과 언약을 세우는 죽음으로 실현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확증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이후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약속과 초청의 성격을 지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계속 반복하기보다는 자연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완성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자신의 선포의 핵심으로 삼으며, 칭의. 화해, 양자됨, 새 창조, 성령 안에서의 삶, 변화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들과 그림언어들을 동원하여 예수의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을 해설하고, 의, 평화, 기쁨, 자유, 희망, 생명 등으로 구원의 축복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여러 범주들을, 그림언어들로 설명한 바울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가운데 명확히 또는 함축적으로 약속되었던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이제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유효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 서신들 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를 대치하고 선포의 핵심이 된 사실은 예수와 바울 사이에 어떤 불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으로 대치되어야만 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 봅니다

하나의 렌즈를 불도저 삼아 다른 모든 말씀을 뭉개야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김영균 18-10-29 05:33
 
^예수님의 건강한 긴장과 역설과 아이러니한 가르침^

이것이야말로 제가 에수님과 바울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주는 긴장이란 예수님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어느날은 부모와 자식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다가 어느날은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도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잘할거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삶은 양면을 넘어선 다채로운 면이 있고 여러 개인들이 모이면 더 다채로와지겠죠. 예수님은 이 모든것울 통일하고 모두 섭렵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마주치는 개인이 가진 구체적 삶의 문제에 집중하셨습니다. 그에게 맞는 단독처방을 하시고 가르침을 주셨죠. 예수님의 말씀들끼리 충돌하는.것처럼 보이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처방을 획일화하는 거, 삶을 개념 속에 담아 정의하는 거, 진리를 특정한 용기에 담는 거! 모두 에수님의 역설과 아이러니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고 봅니다.

^칭의. 화해, 양자됨, 새 창조, 성령 안에서의 삶, 변화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들과 그림언어들을 동원하여 예수의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을 해설하고, 의, 평화, 기쁨, 자유, 희망, 생명 등으로 구원의 축복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삶과 진리를 개념화하고 심지어 예수님의 삶과 부활 또한 개념화했습니다. 같은 언어의 세계라도 에수님의 비유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면서 삶이라는 유연한 현재 진행형과 같이 살아 움직이지만 바울의 개념은 모든 다양함을 하나로 묶어 정의하고 개념이 사람과 삶을 압도합니다. 비유는 살아 꿈툴대는생물이라면 개념은 무생물로 엮인 그물 같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보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바울의 삶 또한 예수님 버금가게 헌신되고 훌륭했지만 바울이 인간과 구원을 다루기 위해 택한 방법론은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그런 종류였다고 제게는 보여집니다.

바울을,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바울이라는 한 렌즈로 성경 전체를 보려고 하는 한국 기독교에 딴지를 걸고자 하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물론 저도 저의 렌즈로 볼 뿐이겠지만요. 수천년에 걸쳐 씌어진 성경은 하나의 렌즈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렌즈는 철저하게 헬라 시대의 이원론적 필터링으로 담아내는 렌즈였기에 지금 우리 시대와는 맞지 않다 보여지구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렌즈에도 그 전체가 담기지 않고 필터링도 될 수 없는 다이나믹함 때문에 오늘날도 우리에게  살아 숨쉬는 말씀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쨋든 (이건 비밀인데 제가 최근에 그 인간적 넉넉함과 카리스마에 압도당해서 누님으로 모시기로 한)경옥누님과 다른 견햬를 나누는 것은 불편하지 않고 즐겁습니다. ㅎ
               
박경옥 18-10-30 06:59
 
ㅋ 아우님, 저도 그렇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견을 인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 자신의 의견뿐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가 나중에 주님 앞에서 대답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4장10절).

갈등이 있는 상황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의견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의견이나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과연 우리가 서로 사랑했는지, 사랑했는지 답을 해야 합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단지 이견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의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싸랑합니다~~,, 아우님♡
                    
김영균 18-10-30 10:08
 
저두요~.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 간에 있는 많은 장애를 걷어내는 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권사님과 과 저 사이에는 신앙적 관점의 차이마저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느껴요. 자유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철저한 순종으로 자유로와지는 길과 철저한 깨뜨림으로 자유로와지는 길! 박권사님과 저는 각각 전자와 후자의 길을 택했지만  둘 다 하나님 안에서 결국에는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영혼끼리의 교제에는 그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박권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
마니마니 싸랑해요~ 누님.
최종국 18-10-27 07:00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른 결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잘 풀리면 교만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이 어려워지면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손질하시고 결정하시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길과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바울과 같이 겸손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의뢰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박창훈 18-10-27 07:49
 
"혹시 내가 여러분과 함께 머물며 겨울을 보내게 될 것도 같습니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춥고 스산한 겨울을 함께 지내고 싶은 공동체를 그리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의 아쉬움을 미리 다짐해두는 준비도...
배상필 18-10-27 13:05
 
14.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22.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사랑을 여러분 모두에게 보냅니다.

바울은 사랑의 권면으로 고린도전서를 마무리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다른 견해들로 교회내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접한 바울은 '사랑'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4절에 모든 일을 할 때 '사랑'으로 하라고 하는데 사랑을 '태도'로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로 합의를 도출하고, 같은 형제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아가는 자세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랑은 교회 안의 교우들 뿐아니라 세상 사람들 -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포함 - 모두에게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성품인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정진옥 18-10-27 18:10
 
20.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