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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언덕교회입니다.

청년회 게시판

 
작성일 : 14-06-03 21:37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글쓴이 : 박소현
조회 : 2,771   추천 : 1  
4월 독서토론 책이었던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당시엔 읽지 못하고 재영 오빠의 요약문을 듣기만 했었는데, 이후 재영오빠에게 책을 빌려 다 읽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필요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인 울림이 있어 발췌한 내용을 남겨봅니다. 좀 길긴 한데 책 후반부에 좋은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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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 방정식

1. 돈
먹고사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수입
+ 소소한 취미 활동이나 교제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
+ 그러려면 직장에 다녀야 하는데 이왕 다닐 바엔 그런대로 보람 있는 일이라면 좋음

2. 애정
열애라고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다투지 않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반려자
+ 가능하다면 아이도 몇 명

3. 건강
종합검진 결과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치명적인 병에는 걸리지 않아야함

4. 노후
되도록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는 것
+ 노후에 대비해서 저축하기
+ 그래서 그리 비참하지 않은 후반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런대로 합격

숭고함이나 위대함이라는 높은 선과 비교하면 매우 평범하고 진부한 수준이지만,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행복의 합격 기준은 굉장히 높다.
이것이 과연 만인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
고작 그 정도인 것에 불과할까.
이것이 과연 평범한 삶일까.
이를 굳이 평범하다고 한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평범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탈락하고 있다.
그리고 고작 그 정도의 행복에도 편승하지 못하고 탈락해
자신에게 그런 행복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심각한 사회 문제인 100만 명 이상의 우울증 환자다.
또 그들이 1998년 이래 연간 3만 이상의 자살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우울증 환자 수 역시 '그나마 의사에게 상담하러 갈 힘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숫자일 뿐.
모든 것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근대에서, 예전의 '고체적인' 근대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행복은
이제 일부 혜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특권'이 되고 말았음.
무엇을 행복이라 느끼는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임.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복감을 손에 넣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행복 방정식'을 근저에서부터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의 의미와 행복감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일.
도대체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영리 활동은 윤리, 의미 부여가 떨어져 나가고 스포츠같은 경기가 되었고,
승자만이 살아남아 행복의 축배를 들 수 있다.
패자는 불행해질 뿐 아니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딱지가 붙고 경기장 밖으로 쫓겨난다.
자본주의라는 게임에서 패자의 굴욕과 불행을 맛보고 싶지 않으려면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베버는 자본주의적인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는 인간유형을
'최후의 인간'(마지막 단계의 인간)이라 불렀다.
“이 최후의 인간은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이 ‘무’인 존재는 일찍이 인간성이 도달해 본 적이 없는 단계에까지
이미 올랐다고 우쭐해할 것이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행복의 변신론(신을 변호하는 것): 부나 행복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귀족의 지위도 하나님이 주신 것.
대지진이나 원전사고를 생각하니 동의가 안 됨

고난의 변신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현세 저편에 신의 나라가 있는데,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행복재’를 빼앗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가치의 역전에 의해 현세에서의 고난이나 수고에 더욱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됐던 것.
다만 역설적이게도 이 사람들은 현세의 모든 생활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다시 만들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흥과 발전에 공헌하게 되고 맒.


“‘자기를 찾아라’라고 외치며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빈틈없는 마물 같은 시스템은 ‘상품이 되는 것’을 찾아내 이용하는 데 매우 뛰어납니다. 특히 ‘불안’의 냄새가 나는 것을 이용하는 데 무척 뛰어납니다.” 106면


“이처럼 과학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인류가 당연한 것처럼 마음을 기울였던 신이란 무엇이었을까,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미신과는 다른 게 아닐까, 의존심이나 약함과는 다른 게 아닐까, 그것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지금의 괴로움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관심을 가지고 종교에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도킨스와 히친스, 그리고 이글턴 중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의문이 드는 것은 과학은 왜 그렇게까지 종교를 내쫓는 데 정열을 불태울까 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도킨스 등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물음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142면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지향한 최종적인 목표는 ‘완전고용’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달성된 시대는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이상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대로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경제학의 궁극적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장경제는 어떨까요. 제일 중요한 목표가 완전고용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설사 실업을 낳더라도 경제적인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된 게 아닐까요. 비정규직 고용으로 극한까지 인건비를 줄이고, 시급을 턱없이 깎는 상황을 보면 싫든 좋든 간에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만성적으로 실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하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시장경제는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까지 실업률을 높이는 쪽이 부를 극대화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그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변용하고 일탈해 버린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의 원인을 사회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능력 문제라는 쪽으로 돌려 버리는 사고가 유력합니다. 예컨대 실직한 사람이 ‘내 일이 없어진 것은 사회가 나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어리광부리지 마’라든가 ‘남 탓 하지 마’라고 말하며 일축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고용 상황을 뒤덮고 있는 이런 가치관이 수많은 실업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실직한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사회에서 무용한 인간이라고 느끼고 무감동, 무관심에 빠진다고 합니다. 실업신경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살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바깥 세계에 대해서도 시선이 가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에도, 정치에도,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무감동하고 무관심한 상태가 퍼져 나갑니다. 즉, 실업과 고용 문제는 단순히 경제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문제를 순수하게 개인의 자질 문제로 환원하고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듯이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눈을 감는 지금까지의 ‘행복 방정식’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165-166면


“인간은 누구나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산다고 프랑클은 말합니다. ‘일회성’이란 그 사람의 인생이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유일성’이란 그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의 탄생과 죽음에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뿐이고, 따라서 사람은 둘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연함이 상당히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 살려고 한다면, 인간다움의 근본인 이 ‘일회성’과 ‘유일성’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망각된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사람을 상품화하는 시장 경제 지상주의에 있습니다.” 167면


“그렇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마는데, 인간에서 정말 귀중한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아닐까요.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아직 없는 것이고 '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인생’이란 ‘내 과거’이니, ‘나는 과거로소이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은 인생을 중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역으로 ‘가능성’이라든가 ‘꿈’이라는 말만 연발하며 미래만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무책임한, 또는 그저 불안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9면


“인간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유일성’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상품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장 경제 안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 상품화된 경제 시스템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어, 사람의 존엄함을 현저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169-170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입니다.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있고, 주장을 가진 개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도 없는, 대체할 수 없는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좋은 것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당신,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독창성을 탐구하는 ‘진짜’나 ‘자기다움’에 대한 지향은 확실히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처럼 군중의 늪이 전 세계를 뒤덮고, 많은 사람들이 그 늪에서 모래알 하나로 가라앉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떠오르려는 개성의 비명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적인’(진짜의/자기다운) 존재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깊어 파고들어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극복해야 할 사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요.” 171면


“이 장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으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인간의 진가 그 하나.
 그것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입니다. 이 말에서 곧바로 연상되는 것은 회화나 조각 등 이른바 예술적인 창조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과학에서 이루어지는 발명이나 기업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개발, 상품이나 서비스의 창조, 뭔가 업적을 쌓는 것도 창조입니다.…

 인간의 진가 그 둘.
 그것은 ‘경험’입니다. 원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뭔가를 ‘창조’하는 것이 멋지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적어도 ‘경험’이라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아르바이트를 해 보고, 낯선 나라를 여행해 보고, 뭔가를 배우는 모임에 가입해 보고, 자원 봉사 활동을 해 보는 것입니다. ‘창조’보다는 못하다고 해도 ‘해 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경험만으로도 인생에 무게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가 그 셋.
 그것은 ‘태도’입니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며, 그저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자칫하면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로서 이 ‘태도’를 가장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지금 가장 중요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것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네트워크 사회 또는 시장 원리 앞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태도’를 획득하는 일입니다.

 ‘태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프랑클은 한 말기 악성종양 환자를 예로 듭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 데 없는 인간다운 업적’이라며 칭송했습니다.” 174-176면


“태도라는 가치는 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효율적인가 비효율적인가, 유효한가 무효한가 하는 것 너머에 있고, 또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이나 교환 가치와는 대극의 위치에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적인 것’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이 가치는 한없이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을 나타냅니다.” 179면


“저는 전작 <고민하는 힘>에서 인간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자로부터의 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또 하나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병 때문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타자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업만이 인간의 존엄이 있는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 안에서 일을 함으로써 뭔가 생산물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진 인격의 모든 원천은 아닙니다. 직업 이외의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자신답게 살 수 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열심히 바라면 존엄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순간 한 순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나’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 180면


“프랑클도 자신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눈은 사물을 보지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소세키도 자신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소세키가 그린 인물은 자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몹시 고뇌하는 사람들뿐이어서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역설’로 쓰인 것으로, 소세키는 자기를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 183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 흔히 ‘이 인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든가 ‘이 인생에서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절망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끝내려 하기도 합니다. 7장에서 예로 든 <아무것도 아니야>에 나오는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의미 있는 것’ 찾기에 사로잡혀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프랑클의 주장은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프랑클은 이런 사고의 역전을 ‘코페르니쿠스적 진화’라고 불렀습니다. 수용소 사람들에게 이 생각을 적용해 보면, 인생 쪽에서 ‘너는 견디기 힘든 이 굴욕을 견딜 수 있는가?’라든가 ‘너는 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고 몰어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하나씩 ‘예,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 그것도 받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물어오는 것에 대해 계속 대답해 간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도중에 대답하는 것을 그만둔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임’으로 번역되는 responsibility라는 영어가 ‘응답’을 의미하는 response에서 파생한 말이라는 것도 ‘대답한다’는 것과 ‘책임을 진다’는 것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의 물음 하나하나에 정확히 ‘예’라고 대답해 가는 것은 결코 낙천적인 선택이 아니라 대단히 무거운 결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앞에서 본 세 가지 가치에 대응시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 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입니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이며, 이 태도는 운명을 그저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185-187면


“1장에서 소개한 카를 힐티는 ‘사람이 의식에 눈뜬 최초의 순간부터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가장 열심히 찾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행복의 감정이다’(<행복론>)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구할 수 없고, 구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도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이것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경우의 ‘태도’입니다만,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사회나 세계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재검토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사람을 상품화하여 물건처럼 취급하는 시장 경제의 존재 방식이나 사람을 이름 없는 군중으로 바꾸고 공공 영역을 생략해 버리는 직접 접근형 사회의 문제에도 새로운 빛이 비칠 것입니다. 또 공공 영역뿐 아니라 해체되고 있는 가족이나 지역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도 새로운 숨결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의 변신론에 의한 행복 방정식을 바꾸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그렇게 해 나가는 과정에서 행복 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은 틀렸다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추방’형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 생겨난 사회 안에서 ‘거듭나기’의 인생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0-192면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낙관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임으로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되,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는 것입니다. 환갑을 넘기며 저는 이글턴이 말하는 이런 ‘비극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