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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예배 (김태완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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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본문: 누가복음 20장 19~26절

 

누가복음 20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간 직후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과 하신 세 가지 논쟁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논쟁 중 두번째 논쟁으로 바로 납세에 관한 논쟁입니다. 19절을 보면,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은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려는 자기들의 모습이, 비유 속에 나오는 은혜를 거부하는 농부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를 이해했으면서도 비유의 의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비유의 의도는 정죄가 아니라 농부를 향한 포도원 주인의 기다림과 사랑을 알고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이 비유의 목적인데 그들은 그것에 관심 두지 않고, 즉시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19절). 그래서 그들은 일단 물러나 20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들”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 ‘정탐들’은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으로 구성된 무리입니다(마 22:16; 막 12:13). 흥미로운 두 구성원이 모였습니다. 이 둘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데 바리새인은 정통 유대인으로 유대 국가를 사랑하고 특히 종교적으로 로마는 유대교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반면 헤롯당은 로마 주둔군을 환영하며 헤롯 왕가를 통해 로마가 이스라엘 땅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해결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서로 한 팀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바리새인의 제자와 헤롯당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겠다는 한 목표를 두고 한 팀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생각에는 예수님만 죽으면 바리새인은 유대인 가운데 누렸던 인기와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헤롯당은 헤롯 왕가가 장기 집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정탐하러 온 자들은 지금 위선의 가면을 쓰고 아첨을 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즉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라고 참된 말을 하고 있지만, 거짓된 위선적인 태도로 예수님의 마음을 얻고 안심시킨 후 시험에 빠트릴 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을 칭찬한 후 바로 “그러면…”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분이라면 우리의 질문에 답해보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마 22:17). 그리고 회심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22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당시의 가장 뜨거운 이슈, 이 문제로 사람이 목숨을 걸었던 문제, 유대인 사회에서 찬반으로 의견이 분분했던 문제의 핵심을 지금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메시아, 유대인의 왕이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을 무시하고 가이사 황제와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겁쟁이 같은 대답을 한다고 책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조국을 회복시킬 것이라 기대한 많은 백성이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 분명합니다. 또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거야 말로 예수님을 즉시 잡아 가둘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됩니다.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책잡아 로마 군대에 보고하고 유다 같이 정부에 반란을 꾀하는 범죄자라고 고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나오는 것처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간계를 아신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데나리온, 즉 “세금 낼 돈”을 자기 앞으로 가져와 보여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2:19).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에서 한 데나리온을 꺼내 예수님 앞에 가져왔을 것입니다(마 22:19; 막 12:16). 그들이 가져온 동전 앞에는 가이사 티베리우스 얼굴이 새겨져 있고 “티베리우스 가이사,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신의 아들). 동전 뒷면에는 “대제사장”이라는 문구와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가 평화의 여신이 성육신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여신의 아들). 그들은 이렇게 우상숭배의 문구와 형상으로 앞뒤가 도배된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늘상 그 동전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예수님께 황제 숭배의 문제점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단번에 드러내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24절에서 그 동전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이사의 것, 즉 이 세속 사회에서 살아갈 때 세상이 요구하는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가 요구하는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로마의 법과 질서를 거부하고 싸우라고 하실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을 따르라고 말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고민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잘못된 권력, 부패한 권력이 나라를 좌지우지 할 때도 우리는 그 권세에 순종해야 해야 하는지, 그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존중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또 두 번째로 이 구절을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가이사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인 태도죠. 세상과 교회는 완전 다르며, 합쳐질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구절이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봐서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의 가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진 동전을 가이사에게 바쳐야 했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간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고통 받는 생태계를 하나님의 창조 섭리, 보시기 좋았다며 감탄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청지기로써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모습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롬 12:1).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우리 세상에서 노동을 하며 번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가서 6장 6절~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제사보다, 제사의 드리는 제물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삶을 더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을 이스라엘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해합니다. 가이사 것 즉 로마의 것과 하나님의 것 즉 이스라엘 것을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을 보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반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부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본문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것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이 세상의 돌 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가이사의 왕국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력과 질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들이 사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 권력, 제도, 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 통치자를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의 종인 통치자와 정부가 하나님 뜻에 거슬러 국정을 운영할 때 담대하게 그것에 반대하고 겸손히 그것을 비판하며, 때로는 순종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12:21). 언덕이 코로나 방역 지침에 대해서 철저하게 지키고, 오히려 더 보수적으로 지키려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세상의 법과 권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웃을 배려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그것을 어떻게라도 회복하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쉽게 잡히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겪는 물질적, 심리적 부담이 상당합니다. 좌절과 낙망하기 쉬운 시기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버티며 견디는 이유가 있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던 제자들,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희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그 종말에 때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를 기다리기가 버거운 상황입니다. 언제 그때가 올 줄 모른다는 막막함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의 감격과 기대를 떨어트리게 만듭니다. 감격과 기대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역동성을 잃어버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주님의 선포가 무색해져 버립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을 희망하고 사는 우리가 그때까지 견디고 버티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미리 사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선취’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오기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질서와 법대로 사는 삶을 통해 우리는 그날이 올 날까지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이사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것을 찾아 드리는 삶입니다. 교회는 그런 소망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 희망을 얻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림절,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억하고, 고대하는 절기를 보내는 시간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언덕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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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2.15 09:46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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