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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이지 않은 진보적 복음주의 배상필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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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nduk.or.kr/bbs/bbsView/32/5821153

제가 최근에 읽은 뉴스앤조이 기사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어서 올립니다. 저도 조금 있으면 50대가 되는데, 언덕교회가 어떻게 하면 젊은층을 수용할 수 있고, 젊은 교회가 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이 기사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뉴스앤조이가 20-30대 젊은층의 의견을 듣기 위한 기획기사입니다.

이 글의 필자는 20-30대입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720 

 

 

 

2019년 한 복음주의 단체 대표가 사적인 일로 물의를 빚어 대표직을 사임한 일이 있었다. 그는 올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복귀를 알렸다. 복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는 한국 '진보적 복음주의'1)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복귀를 알리는 글에는 진보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계·교육계·사회운동계 등 각계 중년 남성 대표들이 몰려와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그는 성공적으로 복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했고, 그는 결국 계정을 다시 비활성화했다.


가해자에게 주어지는 공개적인 위로와 격려를 보며, 피해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 사건이 한국 진보적 복음주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생각한다. 주목할 점은 물의를 일으킨 대표와 그를 격려한 진보적 복음주의 운동의 대표 인물이 모두 50대 전후의 '중년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근대의 탄생과 함께 출현한 사회학은 전통 사회와는 다른 근대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학자들은 '분업' 또는 '분화'를 키워드로 근대사회를 설명하고는 했는데, 쉽게 말해 근대사회는 정치·경제·법·문화·종교·예술·과학(학문) 등 영역이 독립된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고 고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정치가는 종교인이 아니고, 예술가는 법관이 아니며, 국회는 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 정치 분야에서는 정치적인 것을, 종교 분야에서는 종교적인 것을 통해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근대사회 분화를 설명한 서구 사회학자의 관찰과는 다르게 한국 사회를 관찰한 사회학자는 다른 해답을 제출한다. 사회학자 김덕영은 한국 근대를 '환원 근대'로 규정한다.2) 이는 정치·종교·법·경제 등 사회 각 영역이 고르게 분화해 고유 영역을 갖는 서구 근대와 달리 한국 근대사회는 사회 모든 영역이 정치·경제 분야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근대화는 다양한 사회 영역 각각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의 발전이 곧 다양한 사회 영역의 발전인 양 '환원'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곧 보수·극우 개신교(이하 보수 개신교)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주류 개신교는 정치·경제에 종속된 식민화한 종교이며, 종교 고유의 의미를 퇴색하고, 교의敎義보다는 정치적 의제로 구별된다는 식의 분석·비판이었다. 진보적 복음주의 역시 이러한 분석을 이어받아 보수 개신교를 비판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 역시 정치·경제에 식민화한 종교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보수 개신교와 함께 진보적 복음주의 역시 교의보다 특정 정치집단의 정치적 의제에 종속된 것 같다. 이런 분석이 없었던 것은, 보수 개신교와 달리 진보적 복음주의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면화한 것은 문재인 정부 이후의 일이다.

박근혜 정부 때까지만 해도 진보적 복음주의는 반정부적 의제를 포용하며 청년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이 세월호 참사, 탄핵 정국 등 정치적 국면에 적극 참여해 개신교 주류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기존 교회에서 해소할 수 없던 사안을 다룬 것은 사실이었다. 진보적 복음주의를 필두로 한 개신교 진영은 '반反박근혜, 반새누리당'이라는 우산 아래 모여 한편으로 연대할 수 있었다. 보수·극우가 주류인 개신교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의 세력화는 신선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박근혜'라는 정치적 의제는 '진보적'이라기보다 아주 사소한 '상식'에 기초한 것이기도 했다. 보수적으로 기원된 한국 정치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를 포함한 극우·보수당의 행보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비판할 수 있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른바 리버럴 정당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권은 한동안 순항했다. 남북 평화 무드가 조성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추념식에서 보인 대통령의 행보 등은 국정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조국 전 민정수석·법무부장관의 정치적 스캔들, 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범죄 피소 및 사망 등 사건이 잇따르면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두 사건 모두 이 지면을 통해 완전히 분석하기 어려운 지점은 존재한다. 다만 조국 전 장관이 딸의 입시에 동원한 경제·사회(관계) 자본의 사용 및 정황은 설령 위법이 아니더라도 분명 진보적 가치를 위배하는 일이었으며, 사망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부 그린벨트 개발안에 반대하며 대권 주자로서 정치적 존재감을 적극 과시하던 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비겁했다.

'그래서 국민의힘이라는 거냐?' 하는 유치한 질문은 차치하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드러난 여권의 여러 문제는 일반 시민도 충분히 합리적 비판이 가능했다. 하지만 진보적 복음주의 테두리 안에 있는, 교수·종교·운동가 등 수많은 인물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정권의 이런 행보를 어떻게든 정당화·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재인 정권의 위기 상황에서 진보적 복음주의가 추구하는 '진보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국면을 통해 진보적 복음주의는 '민주당 복음주의', '아저씨(중년 남성) 복음주의'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과거 진보적 복음주의는 보수 개신교와 대항하며, 주류 개신교와 생각을 달리하는 청년의 해방구로 일부 작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보는 딱 민주당까지였다. 그들의 숭배 대상은 대통령과 그를 위시한 여권 세력이며, 그들의 교의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적 측근의 정치적 의제였고, 진보적 복음주의 신자와 민주당 당원의 차이는 모호해 보였다. 단순히 그들의 정치적 지향이 민주당 스펙트럼 안에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진보적 복음주의 고유의 준거를 통해 정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정치 지향을 종교적 언어로 성화聖化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 때만 해도 진보적 복음주의는 '정치하는 그리스도인' 같은 주제로 숱한 세미나·모임·출판을 하며 정권 비판에 힘썼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신의 나라가 완성되었기 때문일까. 물론 당시와 지금 정국 차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 신의 나라 이상향을 완성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들 사이에 비판하는 움직임이 소멸한 것은, 그들이 상상하고 욕망한 신의 나라가 민주당과 문재인의 나라였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진보적 복음주의 대표 인물들은 설교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문재인과 여권을 지지했고, 문제를 일으킨 조국 전 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옹호했다. 특별히 약자를 위한 기독교를 표방했던 진보적 복음주의가 박원순 시장과 관련해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무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보수 개신교가 한국 독재 정권과 보수·극우 정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며 지원사격한 것과 같이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 역시도 정치에 종속된 종교의 전범典範이다. 진보적 복음주의의 교의, 특별히 행위를 강조하는 구원론, 현실 참여로 이어지는 '하나님나라 신학'과 종말론은 진보적 복음주의라는 한 종교 집단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수당 말고 민주당을 선택하라'는 하나의 메시지가 됐다. 보수 개신교가 국민의힘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면, 진보적 복음주의는 민주당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렇게 종교 영역은 고유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종교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으로 변해, 정치의 균열 구조를 최종 심급으로 하는 종교적 대리전으로 전락했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으며, (나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며 한 번도 민주당이 '진보 정당'이라고 배운 적이 없다) 민주당에 종속된 종교 집단이다. 진보적 복음주의 대표 인물은 대부분 민주당을 숭배하며, 아저씨(중년 남성)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청년이 당면한 시급한 사회문제들, 예를 들면 여성주의 문제, 권위주의 및 생활의 민주화 문제, 성소수자 권익 문제 등을 종교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당의 정치적 교의, 정치적 상황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는 이를 지지할지 모르나, 생활에서는 체화한 사회적 습관 때문에라도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현재 진보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중년 남성 대표' 중 자신 있게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성소수자 이슈에 적극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그런 집단을 '진보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진보라는 명명은 그저 '자위'를 위한 것이 됐다.

보수 개신교가 싫지만 가족·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출석한 이들처럼, 이제는 진보적 복음주의가 싫지만 정情 때문에 교회에 남아 있는 청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가나안의 가나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표면화한 민주당 아저씨 복음주의의 민낯을 보고 진보적 복음주의에서 이탈하는 청년들이 이미 빈번히 관찰된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생활에서는 권위적이다. 청년들은 소외를 느끼고 이 대열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것을 진보적 복음주의의 내부 분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탈한 청년들은 종교 집단을 세력화할 정도로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에, 이 현상은 진보적 청년 종교인의 소멸로 이어질 것 같다.

요컨대, 진보적 복음주의는 진보적이지도 않고, 종교 영역 고유의 기능·의미를 창출해 내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글은 피상적인 인상 비평에 불과하다. 진보적 복음주의 내부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청년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다만, 진보적 복음주의가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 역시 보수 개신교를 따라 고루한 집단이 돼, '민주당 복음주의', '아저씨 복음주의'라고 불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두크나이트 /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진보적 복음주의로 이적했다가 3년 전 결국 비신자가 됐다. 대학에서 사회학과 정치외교학을 공부했고, 종교 바깥에서 한국 개신교를 관찰하고 있다.



1) 교회사학자 배덕만에 의하면 '진보적 복음주의'란 "자신의 정체성을 복음주의로 규정하며, [신학적] 진보 진영과 명확히 선을 긋는다. 하지만 교회와 사회적 쟁점에 대해선 진보적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보수적인 주류 복음주의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한 흐름이다. (인용문의 [ ]는 필자가 추가하였음.) 배덕만, '한국의 진보적 복음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2015.
2) 김덕영, <환원 근대>, 도서출판 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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