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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9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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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2~17절

친구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는 은유적 표현을 계속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 생명의 떡, 생수,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 등으로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친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친구'라는 표현은 가벼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거기서 니는 포도주로 첫 성,찬을 나누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의 비장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모습이 어때야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는 오늘 본문의 시작(12절)과 마지막 절(17절)에서 같은 명령을 말씀하시는 샌드위치 기법으로 우리를 그 주제에 집중하게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연이어 나오는 13절의 강력한 말씀에 집중하여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읽었습니다. 그 절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에게 부탁하신 명령으로는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선민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수직적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 새 이스라엘, 즉 제자들과 함께 시작된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수직적 사랑만 아니라 수평적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고 하십니다.

 

수평적 사랑이란 먼저 수직적으로 사랑받은 이들로부터 적극적으로 흘러나가는 사랑입니다. 실제 사랑받은 자는 'must'의 마음이 아니라 'love to'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의무감으로 지켜야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내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5절 말씀에서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의 개념을 허무십니다.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며 그 관계를 격하게 허무십니다. 아무 비밀이 없고 허심탄회한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13절 말씀을 예수님의 사역에만 국한시키지 않으십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예수님의 사역은 그분의 친구들인 제자들을 통해 계속돼야 하는 사역이고 제자들에게도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기 십자가의 길이 놓여있다고 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이 말은 공관복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요한복음 버전인 것입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고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희생과 순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현 시대에서는 이 명령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세속적인 사회에서 신앙 양심을 따라 성경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지체되거나 이런저런 방해와 오해를 받을 때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개혁교화라는 기치를 걸고 출발했지만 모이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함께  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날 때도 이 시작하게 하신 일이 너무 중요하기에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주님의 친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어려울수록 더욱 신앙에 굳건히 함께 서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친구로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친구 삼아주셨습니다. 오직 은혜로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되 항상 맺는다고 하십니다. 여건, 상황, 조건과 상관없이 그리고 또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남게 될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기에, 그래서 언제나 들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이기에 언제나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이며 계명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셔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이 명령들은 주님께서 친히 택하셨다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명령은 약속입니다. 이 명령들은 우리 능력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명령을 이루고자 구하는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하게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주님께서 하시려는 그 사랑을 막지않는 것입니다. 제한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감동주실 때 주저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아니고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고톰에 대해 사변적인 답을 찾기위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모든 대답은 실패할 것입니다.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을 재촉할 뿐이며 어떤 아픔도 경감시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아픈 사람과 동일하게 아프진 못하더라도 멈추어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의 공간과 시간 속에 우리 주님께서 '친구'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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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7.24 15:13

    눈으로 읽는 설교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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