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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박경옥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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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추수감사예배)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다” 

- 누가복음 17: 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는데, 한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마을 어귀에 있던 열 명의 나병환자가 멀리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 나병, 지금의 한센병은 당시에 하나님의 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병은 또한 환자로 하여금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 소외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족과도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존경받는 사람이었더라도, 부자였더라도, 그리고 주목받는 사람이었더라도, 이제는 그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는, 이렇게 버림받은 몇몇 나병환자가 서로가 갖고 있는 공통의 아픔으로,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면서, 마을로부터 생긴 음식을 구걸해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모이게 된 것이 열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9명의 유대인과 1명의 이방인, 즉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11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지역이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병환자끼리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유대인 종교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체념으로 남은 여생을 이렇게 같이 살자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아니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가 하나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할 수 없으니, 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러서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 환자들의 아픔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그 자리에서 치료해주시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열 명 모두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다가 저들도 모르게 병이 나았습니다. 그 즉시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에게 가라고 할 때, 그대로 간 사람들이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그대로 순종할 때 치료함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부터는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와 관련하여, 바로 이 부분을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유대인 9명은 모두 제사장에게 그냥 갔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머지 1명의 사마리아 사람만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나병에서 낫는 일은 아주 기적적인 일이지만, 그들은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완전히 나았음을 검사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한 건강한 성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지게 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냥 가고, 유독 한 명의 이방인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했을까요? 

그냥 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잊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빨리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봐야지” “제사장에게 빨리 가서 나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사람들과 정상적 삶을 살아야지” 등, 자신의 삶을 생각하느라 정말로 그들이 알아봤어야 할 예수님을 잊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생각과 사회적 관습에 뿌리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종교적 관습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관습과 종교적 상식이 만들어낸 이 “고정관념”은 결국 제사장과 이웃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고 가장 중요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은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유대사회로 보자면,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고정관념이 없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나병이 낫자마자,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있던 저주를 푸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인은 15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이방인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께만 드리는 찬사와 절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께 감사를 하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감사와 관련하여, 10명 가운데 1명만이 감사를 했다는 사실에서 우선 “감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경험으로도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 자신도 이 고정관념 때문에 진리를 흘려버리고,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와 그 순간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으로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잘 되었을 때,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이번 추수감사주일은 별로 감사할 것이 없게 보입니다. 남들보다 더 잘된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꼬여버린 일들이 더 많습니다. 자녀들이나, 건강이나, 사업이나, 대인관계나, 사회적인 지위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리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 깊숙이 간직해 와서 이미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버린 그러한 생각들도 올바로 주님을 발견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감사가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도 세상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 세상의 고정관념으로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았다는 것도 세상의 고정관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몰상식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믿음이 시작되어 그것을 키워왔습니다. 

 

특히 오늘의 감사주일과 관련하여, 올해에 감사의 내용은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던 감사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며,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의 생활을 둘러보는 일에서부터, 고정관념을 내려놓자고 제안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지금처럼 도저히 감사할 것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라는 말을 떠올리며 길어올릴 수 있으리라라는 것입니다.

 

2020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예배에, 어느 정도 극복이 되리라 예상한 감염병의 재확산의 길목에서, 감사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면예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다시 불안해집니다. 어찌 보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감염병은 질병자체의 공포와 아픔, 그리고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의 생업은 대부분 회복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처음 우리의 바람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의 일상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현재의 상황, 이 새로운 일상에서라도 생존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나병환자들의 바람도 바로 그 일상으로의 복귀였습니다. 그들의 바람은 바로 병이 발병하기 그 이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복귀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으로의 복귀가 실제로 눈앞에 이루어지자, 정작 그들의 믿음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사실은 그들에게는 기적이었음에도,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못하자, 그들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감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바라던 일상으로의 복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에 다시 얽매였습니다. 당연함의 고정관념은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아픔과 고난 가운데서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를 짓누르는 압박감으로부터 깨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만 바라보면 우리의 주님을 놓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지쳐가는 환경에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안인은 이방인처럼, 소외되고, 주변부에 머물렀기에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방인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중에서 홀로 다시 찾아온 그 한 명 사마리아인에게, 19절에서 더 큰 은혜, 더 중요하고 참된 복을 더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육체의 병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그의 삶 전체를 구원시켜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질병이 나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믿음 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눈앞의 작은 기적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구원의 기쁨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방인 나병환자는 멀리서 답답하게 소리를 지르던 삶에서, 치료를 받자 예수님의 발아래까지 나아와 엎드려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른바 당시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한 믿음의 행동이었고 그렇게 그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을 때, 그 때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위기의 상황에서,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복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에 시선을 맞추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의심할 것 없이 분명하게, 함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고, 그리고 멀리서 안타깝게 소리만 지르다가 이제는 발아래 아주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정으로 그리고 마음 깊이에서부터 뜨거운 감사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과 상황에서, 감사를 시작하는 신앙인, 그리고 이 어려울 때, 함께 보듬으려는 공동체야말로 추수감사주일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 그 감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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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1.23 13:38

    고맙습니다.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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