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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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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20-26절) 

 

요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하신 기도이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20절의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는 말씀에서,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들을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을 통해서 믿게 될 사람들, 즉 제자들을 통해서 앞으로 이루어질 교회,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바로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기도는 한 마디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21절에서 단적으로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22절, 23절에 하나라는 말씀을 계속하시고, 24절에서도 “함께 있어”라는 말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간구하시면서 이제 그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될 교회도 하나가 되기를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교리적인 고백 그 이상임이 분명합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공동체인 우리 사이에서 그 신비한 관계, 즉 하나인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여야 할까요? 21절에는 제자들이 하나이거나 교회가 하나이기 위해서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요한복음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있어서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삶과 사역으로,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그대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순종하며 사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를 통해 드러내시려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에 대한 믿음에서 하나입니다. 21절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인식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인해서, 제자들과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어려움과 시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적인 믿음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로 되는데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가 하는 예배, 교육, 봉사, 선교에 이르는 여러 기능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서로의 체험과 관심과 이해가 달라서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이 곳에 계신다면, 무엇보다도 예배에 집중하실 것이다. 아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는 전도를 하실 것이다. 아니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타문화권에 대한 선교를 하실 것이다. 아니 보다 본격적인 정치적인 이슈에 의견을 표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실 것이다. 아니면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하실 것이다 등등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믿음의 견해는 있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에서, 어느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이 흐트러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이고, 흩어지고, 그리고 다시 모일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바로 그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20절에서,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제자들은 말로 자신들의 믿음,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사람들 앞에서 간증했으며, 그 말로 한 것으로 인해 고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로 행한, 믿음의 고백과 간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던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 믿음을 얻게 되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특히 말로 이루어지는 고백과 간증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고백적인 말로 인해 세워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자적인 교리를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에서 교회가 세워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조차 작용하는 그 인간의 이성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에서 하나입니다. 23절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제 교회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어려움과 아픔과 고난을 생략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열외가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고 살아가는 어려움과 아픔과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때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갑자기 닥치는 일들로 인해, 시험이 들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하며, 깊은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특히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한 상처는 더 크고 깊고 오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어려움을 생략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관심과 애정과 연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부분만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가장 힘들게 고통 당하는 연약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결국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는, 저돌적인 행동이 포함된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으로 돌보시고 보살피고 결국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교회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출발점이요, 전초기지이며, 전략적인 요충지입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혹 누군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나는 도움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로 보자면 이러한 대단히 대견하고 존경스런 삶의 태도도 교만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일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겸손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솔직한 고백에서부터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삶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그런 영웅적인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범주 안에서, 작은 관심 그리고 작은 불편이나 불쾌함을 감수할 정도의 배려와, 때로는 함께 하고 싶지 않지만 꼭 만나야 할 그 사람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반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주님과 영광을 함께 하는데 하나가 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자신의 영광을 이미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주님께서 당하신 약함과 수치, 그리고 패배와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약함과 수치 그리고 패배와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가신 길이기에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겪으신 의로운 자의 약함과 수치, 그리고 패배와 죽음을 겪는 것이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일을 우리 주님께서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도 “영광”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앞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간구입니다. 앞으로 교회가 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당장이나, 며칠 있다가나, 몇 년이 지난 후에 있는 일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종말론적인 상황에 목격할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이 영광은 교회가 현재의 어려움과 아픔과 고난이라는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지고가기에, 장차 주님과 함께 보게 될 영광입니다. 교회가 지금의 고난을 믿음으로 견뎌내면, 그 숨조차 쉬기 힘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회복시키시는 영광의 순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을 떠올릴 수 있다면, 궁극적인 순간 주님의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된다는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라는 기도가 실현되는 것은 바로 교회가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답답함과 억울함, 때로는 분노와 좌절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견뎌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분명히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확실한 영광입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과 같이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있어서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기도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처음 교회가 어디에서 하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였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 체험,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시간 체험, 성령의 체험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하나의 요소입니다. 바로 이 체험을 하고자 모였고, 이 체험으로 인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 체험으로 인해 하나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각오로 예배실의 문턱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25절에서 나오듯이, 본문의 상황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아니 아버지를 안다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세상에서는 실망과 아픔과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해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예배의 순간처럼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드리는 예배의 순간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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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1.17 11:16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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