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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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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시험: 제자의 길”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 25절-27절) 

 

오늘 본문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12-14절까지의 본문과 19-24절까지의 본문을 생략한 채, 떨어져 있는 두 본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 그러니까 공관복음에는 없는 정보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님을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한 제자도 따라갔었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이기에, 예수님이 심문받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대제사장의 뜰 안에까지 들어갔으니, 산헤드린의 일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본문이 따로 떼어서 보고 있다는 점은 형식적으로 큰 특징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한 문단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으로 나옵니다. 왜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의 이야기를 단번에 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사이사이에 병치하여 놓은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고, 협박을 당하며, 재판이 진행되는 것과 함께, 그 집 문안에 들어간 베드로가 먼발치에서, 혹시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예수님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등등의 오만가지 생각으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시에 베드로 자신을 알아보는 여종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과의 관계를 추궁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껏 예수님을 따랐고, 그것도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으며, 13:37에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식사자리에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장담했던, 그 수제자의 거짓말과 실패와 몰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재판과정 사이사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예수님의 재판 중에, 사실은 베드로가 시험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영어로 재판이 trial이고, 시험도 trial이니 본문을 통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예수님과 베드로는 동일한 일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당할 시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보지만, 베드로에 대해서는 시험의 순간, “과연 어떻게 말을 하고, 대처하고, 처신할까?”라는 인간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를 번갈아 보면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실제로 시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을 때, 제자로서의 경험과 관록과 연륜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어떻게든 살아야한다”는 본능으로 인해, 실제로 시험을 당한 사람은 베드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고차원의 논리가 있어서, 신앙의 성숙이 더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우리 자신이 시험을 받는 당사자임을 발견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신앙의 길을 가겠다는 이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동시에 과연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안쪽에서 심문을 받고 계신데, 그리고 모진 협박과 공갈과 모욕을 당하고 계신데, “내가 베드로의 자리에서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장담하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이제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만 남았는데, 그 베드로마저 무기력하게 여종의 질문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말과 약속과 장담이 결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신앙은 처음에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받고 재판을 받고 세상의 권력자들의 손에 넘겨질 때, 그 때 과연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를 계속 추궁당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여러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입니까? 다행히, 17절에서 저와 여러분이 베드로와 같은 시험에 대면하게 되면, 우리가 할 대답은 이미 질문하는 이들의 질문 속에서 나타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바로 이 대답을 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제자들 중에는 정신없이 도망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황을 파악하고 멀리 도망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베드로는 왜 이런 위험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는 곳 가까이 가려고 했던 것일까요? 적어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는 않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년 동안 함께 동거동락 하던 주님께서 체포되자, 지니고 있던 단도로 저항도 했고,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시자 물러나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되시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든 베드로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모습에서 제자로서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지닌 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베드로처럼 조금 더 예수님께 가까이 갈 때 분명히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제자의 배신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주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갔으면 있지도 않을 일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우리가 짐짓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연약한 믿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일신의 걱정이 갑자기 밀려옵니다.나서지 않았다면,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주목받지 않게 있었다면 있지도 않을 일입니다. 아예 자원하지 않았다면 없을 일입니다.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내가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 마음이 일었을 때, 그래서 조심스럽게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다짐할 때,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베드로가 다른 이들보다는 낫다는 사실과, 방금 이 자리에서는 실패를 했지만 그로 인해 예수님과 더 친밀해 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후에 21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만났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이 잡혀서 심문을 받고 있는 그 장소까지 따라왔던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리고 그 베드로에 대한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감동을 얻어, 시작한 주님의 일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로 인해, 때로는 아니 자주, 우리의 연약함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실패할 수도 있고, 좌절에 빠질 수도 있으며, 나가서 통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했던 베드로의 그 순수한 마음을 아무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순수함을 인정하시고, 더 중요한 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을 수 있습니다. 과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야기는 누가 전했을까요? 이렇게 정확한 정황 그리고 장소까지 제시할 수 있는 걸 보면 바로 베드로 자신이었다고 추측하게 됩니다. 후에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기에, 이 이야기가 만약 다른 사람에 의해 전해졌다면 감히 폭로할 수도 없는 X-파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우니까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나 베드로가 나가서 통곡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로 보아 베드로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당시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에 때로는 신앙을 잃기도 하였고, 때로는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기도 했으며,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정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도 3년이나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잡혀가신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있으려고 하다가, 여종이 와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질문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을 못하고, 나는 아니라고 하고, 나중에는 저주하였다가, 닭소리를 듣고는 절망 속에서 통곡한 바로 그 당사자였다고 증언했을 것입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부정했을 때, 이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 신앙공동체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내가 도망가 있는 곳에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다시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주셔서,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의 고백과 간증은 탄압으로 좌절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회복과 용서라는 중요한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는 역사를 통해, 교리와 거룩함을 통해 하나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그 거룩한 사람만 모인 신앙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해지고자 찾은 교회인데, 지금 당장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요? 교회는 거룩한 신앙공동체라는 말은 단순히 명제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거룩함을 향해 나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그리고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목표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 거룩함은 베드로를 회복시켰던 그 기다림에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연약함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용납하며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신적인 공동체입니다. 용서하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진정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됨은 용서라는 기초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시험의 자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시험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할 때, 때로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을 보듬고, 기다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의 결단과 헌신은 늘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헌신하는 이들과 우리 각 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지금 겪는 이 어려운 시험의 때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강력한 구원의 때임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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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1.25 17:2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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