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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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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신 주님” 

(요한복음 18장 1절-11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과 자주 가던 동산으로 나가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이루어졌다는 공관복음의 정보와, 또 요한복음을 통해,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곳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1절에 따르면, 그 동산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다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예수님과 또 제자들을 떠난 유다도 잘 아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적셔주는 떡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13:30에서,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유다가 선택한 길이 어둡고 암울하다는 복선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건넌 기드론 시내의 이름인 기드론도 사실 뜻은 “어두움”입니다. 시간적으로나 이름으로나, 모두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로마군대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부하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왔던 때는 밤이기에 동산이 무척 어두웠다는 정보도 제공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신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두우니, 실제로는 등과 횃불을 들기는 들었지만, 결코 참된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첫 동산, 에덴동산에서 타락을 했던 인류는 기드론 강변에 있는 또 다른 동산에서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신약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타락의 길을 되돌려 모두를 다시 살리고자 그래서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러 오신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사람들이 동산에 모여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서의 일반적인 주제 앞에, 오늘 체포되는 사건부터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의 묶음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이 체포되신 바로 이 동산에서부터,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렷하게 주목해야 할 내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무리들이 정작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유다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으로 미리 신호를 짠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유다가 입을 맞추는 이야기보다는, 유다가 나서기 전에, 4절에서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라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의 시작점에서 망설이거나,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고난의 시작인 체포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과 7절에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에게 두 번이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도, 5절과 8절에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무리들을 향해서, “내가 그니라”고 두 번이나 대답하신 것도, 그리고 8절에서 자신을 체포하는 것은 좋은데, 그 대신 자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협상을 벌이시는 것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인 11절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체포를 방해하는 베드로의 행동을 막으신 것도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마주하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이 그리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면 망설면서 되도록 현실을 외면하고 피하려 합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도, 일단 마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며 복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래서 한 해의 시작은 늘 액땜과 덕담과도 같은 하나님의 복을 빌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늘 변화가 있어서 처음 생각한 것과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있으며 마주하기 힘든 현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체포되는 순간, 결박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그 상황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그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의 허락이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 어렵고 힘든 순간, 주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이 그 모든 상황에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자신의 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아무리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우리에게 닥칠 일들로 인해, 우리의 한 해는 분명히 처음 세운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변하는 것이 인생이고,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변화, 알지 못하는 상황, 처음 겪는 일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마주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분명히 그 상황 전체를 주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계속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이 우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그 상황을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 공관복음에서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라고 밝히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로마군대의 용어를 써서, 군사들이 있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당시 식민통치를 하고 있었던 로마인 지배자들에 의해서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사역은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관계되는 것이고, 총체적으로 전 영역에 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4절에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무리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다”라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 쓰셨던 “나는 나다”라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14에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즉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셨던 그 하나님의 어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누구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선한목자, 부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포도나무다”라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신적인 자신을 드러내시는 어법을 사용하고 계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내가 그니라”, 너희가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장한 자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는 말씀이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에 바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시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기 때문에 나타나는 두려움과 경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체포되는 순간, 제자들을 보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6: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9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17:12의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라는 기도를 행동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시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은 보호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집요하게 물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체포의 순간에 목숨을 건진 제자들은 과연 “순교와 희생을 모면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도 사실 예수님과 같은 순교와 희생의 자리에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그 다음 장면이 우리에게 하나의 단서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말고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들고 예수님의 체포조에 포함되어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칼을 치우라고 꾸짖으신 후에, 공관복음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20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와서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20:25에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을 하셨던 그 잔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걸으셔야 했던 그 사역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었던 바로 그 길을 예수님께서는 잔으로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너무나 간절하게 사양하고, 외면하고, 건너뛰려고 했던 바로 자신의 사명이라는 잔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잔을 들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이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을 받고 십자가의 형장에서 사라져야 하는 그 길을 걷기로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저 함께 끌려가서 죽음도 함께 당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이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살피면서, 이제 제자들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믿음의 결단을 하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잔 앞에서 의연한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묵상하고, 진지하게 되새기면서, 제자들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후에 스스로 주도적으로, 주님과 함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같이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누가복음 21:18-19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보호와 지킴의 약속은 “대박나세요!”와 같은 새해의 덕담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인정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의 기준을 훌쩍 넘어,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한다든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이제 몸으로 직접 뼈저리게 느끼는 엄청난 고난이 삶의 한가운데로 갑자기 밀어닥쳤을 때, 주님께서는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맞이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삶에 주도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만을 홀로 두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가시기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제 2021년에는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우리를 신뢰하여 부탁하신 삶이라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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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1.18 11:48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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