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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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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8장 28-40절) 

 

요한복음은 독자들이 공관복음을 알고 있으리라 상정하여 기록되었기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자초지종에 대한 진술을 생략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본문은 공관복음처럼, 대제사장의 심문이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이야기나, 빌라도와의 재판이나, 그리고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서 역사적인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보다 더 중요하고, 더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설명이나 논리적인 설명 그것보다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 장면은 "그 역설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어떻게 했을 것이가?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설명으로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신앙적인 도전을 주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 역설은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유월절 식사를 지키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방인인 로마인들의 관정인 행정구역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동포인 유대인들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는 로마인들만이 있는 구역으로 끌려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혼자 이방인들에게로 밀어넣은 의도는 유월절을 잘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그토록 기억하고 지키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 이방인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매우 사소한 부분에까지 치밀하게 생활을 하면서, 정작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바라보고 응시하지 못하면 실제로 신앙생활은 지켜야 할 규칙이나 관습만으로 하나씩 둘씩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규칙이나 관습으로 굳어진 신앙생활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소홀히 되면, 오히려 사소한 것에 시야를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규칙이나 관습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과의 교감과 교제와 공감을 더 늘리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타성에 젖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으로부터는 초점이 떠나고, 형식과 모양만 남아 행여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있지나 않은지 늘 묻고 또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자신이 향하는 초점이 늘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를 재차 묻는 자세, 이것이 진정으로 성숙하고 바른 신앙입니다. 

 

둘째의 역설은 빌라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드러나는 대목으로, 빌라도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사형을 집행하게 방조하고 내버려둔다는 역설입니다. 빌라도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31절에서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응은 곧바로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 바로 직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6장-7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에서 판결을 하고,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스데반이 그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직접 돌을 던져서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또 사도행전 25장에서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로마의 황제의 판결을 받겠다고 청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직접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집행할 수도 있는 사형을 로마인 집정관에게 맡긴 것인가요? 아마도 유대인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의 인지도와 지지도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2:12에 묘사된 것처럼, “큰 무리”가 모이는 것으로, 예수님의 지지도가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처형을 자신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집행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른바 dirty job을 이방인들에게 전가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도와 압박과 함께 예수님의 재판을 떠맡은 빌라도도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처음에 33절에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오히려 빌라도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자 당황한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니, 자신도 유대인들과 대제사장의 말로부터 추론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36절에서 자신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세속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7절에서 빌라도가 재차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왕은 맞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목격했던 그런 세속적인 왕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나라와 왕권은 전혀 다른 성격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와 왕권은 이 땅에서 그 어떤 체제에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변하지 않는 진리를 드러내는 나라이며 왕권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13-14에서처럼, 나라의 경계가 없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묵시적인 나라입니다. 마가복음 14:61-62에서 대제사장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종말론적인 나라입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분명히 이러한 나라와 왕권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38절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본문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9절에 단적으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후 19:4과 19:6절에서도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다는 판단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40절에서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외침”에, 빌라도는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도 반란을 두려워하여 의인을 풀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빌라도가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었다는 것에서,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던 빌라도도 결국은 무리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죄없는 약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으로 예수님의 재판을 진행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빌라도가 마주한 역설, 아니 그의 딜레마를 확인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의 역설은 40절에서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는 대목에서 보게 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정치범으로 죽이라는 목소리와 함께, 오히려 거꾸로 강도이며, 혁명가이며, 반역자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역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은 “아바”(아빠, 아버지)의 “바”(아들) 즉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17 각주에는 더 흥미로운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어떤 사본에 바라바라 하는 예수”라고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 바라바를 살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은 죽이고, 예수 아버지의 아들을 살리라고 외치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역설로 가득한 상황을 도대체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는 역설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37절에서 예수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관심과 질문과 생각에까지는 나아가지만,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충돌하면 슬그머니 정의로운 판단과 행동에서 벗어나지는 않는지 늘 물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성경읽기나, 성경공부를 통하여, 늘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진리를 묻고, 진리를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그 진리는 분명히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진리는 말하는 것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는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관심과 질문과 생각의 영역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를 반드시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가 깨닫고 이해하고 인식하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죽음을 대면하느냐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32절에서처럼,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말씀에서처럼,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증명하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설로 가득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세상에 왔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이 변함없는 진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이 온통 역설로 가득한 상황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빌라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때도, 그리고 자기를 환영하는 줄 알았던 무리들의 변심에도, 예수님께서는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왕이신 것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는 말씀에서, 10:3에서 이미 선한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들은 진리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질문도 하고,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분의 양들은 반드시 선한목자가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진정한 진리의 길이며, 진정한 생명과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그리고 본격적인 봄을 맞으면서, 백신으로 조심스럽게 그려볼 수 있게 된, 코로나 이후의 삶을 준비하면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비대면이 새로운 일상이 되어가면서, 교회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건물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덕교회는 분명히 선도적인 교회의 본을 남보다 먼저 모색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와 헌금, 더 나아가 평신도 교회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일상에 비교적 잘 적응했다고도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하고 최적화된 이러한 준비로 인해서, 행여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모습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는지 물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 물음은 당연히 기도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기도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한다고 하면서, 행여 무기력이나, 방만이나, 게으름이라는 역설로 나타나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께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새로운 일상에 맞는, 더 적극적이고 더 분명하며 더 확실한 모습으로,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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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3.1 20:5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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