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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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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오늘 본문은 19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에게 가한 일을 생각하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도 어떤 도발을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문을 잠갔습니다. 그리고 20:9에 따르면,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는 말처럼,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그 상황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비일상적인 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은 바로 그 날 아침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모습으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지금 제자들 가운데 서계신 분이 바로 며칠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고 확인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20절에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정말로 살아나서 우리 앞에 계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상황입니다만, 일주일이 지난 후에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도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라고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상처를 통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분이 지금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과 동일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상처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증명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서 생긴 바로 그 상처도 후에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정체성의 증거가 된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우리 각자가 현재 겪는 고난을 믿음으로 견뎌내면서 얻는 상처는 조금도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그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의 순간에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 고난을 이겨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3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19절 마지막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침에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또 지금은 문을 닫아서 자신들만 있다고 생각한 공간 그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으니, 제자들은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평강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인사로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는 순간,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그 상처들을 보면서 정말로 살아나신 주님을 확인하였고, 이제서야 그들 가운데 마음이 진정되고, 안정되면서, 그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1절에서 다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때는 실제적으로 평안이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퍼진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야 자신들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당한 것과 같은 죽음의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는 순간,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신 분과 함께 평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14:27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미, 제자들과 마지막 말씀을 나누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제자들에게 이 평강과 평안을 약속하셨는데, 제자들은 내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 평안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로 평안을 서로에게 비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인사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만날 때 서로에게 평강과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혹시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마음에 가득 안고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게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도, 우리가 분명히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주님의 평강과 평안이어야 합니다. 분명히 예배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느끼고,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과 평안이 임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 둘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22절에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무언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운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이 오신 것은 오순절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여일이 지나고 나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사이며 역사가이기도 한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증언하듯이, 오순절날 성령강림이 이루어졌다는 증언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언제 성령이 오셨느냐? 부활하시고 나서 오순절날이 아니냐? 바로 그런 역사적인 순서나 설명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언급하셨는가?”에 대한 그 동기를 밝히려고 합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언급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되기를 바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절인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에 단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 있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그 일의 내용은 나오지 않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형식만 언급하셨습니다. 그 형식은 “부활한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왜 보내십니까? 무엇을 하라는 말씀인가요? 무엇을 증거하라는 말씀인가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리라는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제 제자들을 보내니, 이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을 보내신 일은 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성령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태초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하신 말씀과 대구를 이룹니다. 생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듯이, 성령을 통해서 이제 새로운 인간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 사람을 살리는 영,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영을 통해, 제자들은 이제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처음부터 하고자 하신 바로 그 일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계속되었고, 이제 또 성령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될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시작된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일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며, 위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성령을 통한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용서”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 처음부터 계속되었던 것이었고,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이 알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용서”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는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이루신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활이라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인해 흘려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의 의지였습니다.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행여 부활이라는 기적에만 주목하다가, 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삶과 사역을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셨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 부활해야 하셨는지, 바로 그 의미를 놓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역, 위로부터 시작된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수행되었고, 이제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고자 하시는데, 그 전체를 통해 “용서의 메시지”를 보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마지막 23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용서의 말씀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인 내용은 바로 용서였습니다. 부활이라는 기적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바로 이 용서의 일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요, 바로 이 용서를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용서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정말로 힘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서운하게 하거나, 섭섭하게 한 일, 베푼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때, 그리고 선의를 악의로 바꾸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때, 우리 모두는 사실 섣불리 용서라는 말을 떠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이제 우리와 관련을 맺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라도 용서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이 용서는 분명히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용서는 하나님적인 것이고, 신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부활한 주님은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바로 제자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허락하셨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공간을 함께 하는 우리 예배공동체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용서를 부탁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저히 생각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바로 그 사람, 아니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만약에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연민의 마음이나 불쌍한 마음이 행여 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부터는 절대 용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마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 자체보다, 주님의 사역 전체를 생각할 것을 촉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한 평강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평강과 평안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주님께서는 이제 주님께서 하신 용서의 사역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요, 유언에 해당합니다. 이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상식과 윤리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바로 그 일에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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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4.18 21:55

    고맙습니다.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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