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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박경옥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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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25~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우리는 신앙과 관련하여, 은밀하게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되는 생활을, 또 다른 한편으로 알려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숨겨야 하느냐 알려야 하느냐라는 두 물음 사이에서 오늘 본문은 다소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나누던 대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로 뒤의 17장은 예수님의 기도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16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는 끝나고 있습니다. 13장부터 시작된 제자들과의 긴 이야기는 오늘로 끝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껏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여러 번, 비유를 통해서 이미 말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살펴봐도, 예수님께서는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신은 포도나무이며,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15:13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21에서도,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해산한 여인의 고통의 비유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구하려는 행동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에, 지금의 아픔에는 견줄 수 없는, 그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 될 것입니다. 26절에 따르면, 이것은 또한 제자들 자신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날”에는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는 근거가 27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는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누릴 기쁨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7절은 제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는 것에 있다고 하십니다. 28절에서는 조금 더 체계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시면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시면서, 성육신과 부활이야말로 자신의 궁극적인 사역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고,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신 부활절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성육신과 부활의 사역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먼저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그 다음인 것으로 나옵니다. 아들을 사랑하고 그를 믿으면,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고 믿음이 그에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처음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누군가 좋은 사람,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을 따라서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분이 좋아지니까 그분에 대한 믿음이 점점 생긴 것입니다. 왜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은 그 사랑을 반감시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맞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믿음은 조건적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가장 처음에, 제자들이 사랑과 믿음을 갖게 된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즉 요한복음에서 7가지의 표적으로 엄선된 기적과 이적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끌렸고, 그렇게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끌렸던 제자들은 이제 마지막 잡히시던 밤에 주님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제자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제 30절에서,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제자들이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사랑과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리고 그에 대해서 제자들의 사랑과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믿음 자체만으로 보자면, 제자들이 믿는다고 고백은 하고 있지만, 이 밤이 지나면,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고려한다면, “과연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던 거야?”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제자들은 바로 다음에 벌어질, 예수님의 체포와 감금과 심문과 마지막 십자가의 순간에,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만 빼고, 모두 도망치고 맙니다.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도 그 믿음이 있다던 제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는 분명히 믿음 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사랑은 사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또 어떻게 가시는지 그 사실을 잘 모르지만, 그리고 그 믿음이 아직 충분하지 않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나, 교리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완전한 믿음은 아니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에 대한 사랑이 먼저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에서는 박해의 상황에서, 자신은 성화를 밟고 배교자로 낙인이 찍히더라도, 마을사람들을 살리기로 작정한 로드리고 신부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 죽음의 순간,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순교의 순간, 주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런 배교의 모습을 보일 정도의 믿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하거나, 성경도 잘 모르고, 기독교 진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조건이나 믿음의 분량으로 비례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근거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끝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본문 28절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시며, 바로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아직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신앙은 비유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왔다가 가는 것 즉, 순례가 바로 신앙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은 지극한 고독이 있는 길입니다.

 

32절은 예수님의 고독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으로 인한 배신과 배교와 배반 그리고 유기에 대해서, 자신이 고통의 자리에 혼자 남게 될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공관복음서인 마가복음 14:27에서도 이 주님께서 홀로 남겨진 고독한 자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주님을 버린다, 유기한다, 내팽겨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를 앞에 두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 시시각각 밀려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어찌 해 볼 방편이나 도리도 없고, 적막이라는 단어와 고독이라는 단어만이 떠오를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께서 같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독한 고독의 경험이 없다면, 과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를 묻고 싶습니다. 그 절망적인 고독의 순간과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자신의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이나, 신앙을 교양인의 문화정도로 취급하려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그 모든 것에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바로 그 순간에 함께 하는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라도, 아주 힘들어서 내가 신앙인이라 말할 엄두조차 안날 때라도, 누군가에겐 흔한 그 열매조차 없을 때라도, 그때는, 바로 그때는 정말로 나 혼자라도 살아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 혼자라도 올바른 신앙 가운데 있다면, 언젠가 때가 되어 내가 씨앗이 되면, 이제 이 자리에서 새로운 싹들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그 십자가라는 고독한 자리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력한 사역을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힘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힘이 시작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가장 무력했지만, 거기서 가장 강력한 사역을 수행했고, 죄와 죽음과 지옥과 악마와 모든 악을 정복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 자신만이 아니라, 이제 그와 유사한 어려움과 박해의 상황에 놓이게 될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비유와 직설법을 통해서, 반복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알리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 그 결과 대해서 이렇게 미리 알린 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평안, 평강, 즉 평화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여러 번 등장합니다. 14:27에서 이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9-20에서도 불안해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근거는 바로 마지막 33절에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환란에서도 낙담하거나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에게 낙담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심할 일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려워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 이미 주님께서 이기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어떻게 이겼다는 말씀일까요? 제자들이 겪을 일들을 이미 겪으신 주님이십니다. 그 환란이 가져올 낙담과 근심과 두려움의 깊이와 강도를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 환란의 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끝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의미는 단순히 물리력으로, 강제력으로, 군사력이나, 행정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결코 낙담이나 근심이나 두려움 없이 감당하신 주님을 보면서,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이 부활의 신앙으로 환란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거꾸로 십자가에 내몰고 박해와 환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9에서 십자가 처형을 직접 집행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본 후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더라도, 그렇게 아무도 없는 그 나무기둥에 매달려서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환란의 자리는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함께 하고 계시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그 어떤 환란의 자리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함께 모일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온라인을 통해서 동시에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때이지만, 이럴 때, 우리들은 바로 혼자 있는 법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혼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내고, 그리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이유가 부정당하는 바로 이 때, 우리는 바로 근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영성을 토대로, 머지않아 분명히 회복될 만남을 준비하고, 소원했던 그리운 이들과, 아프고 외로운 이웃들과의 시간을 더 간절히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에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만남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소식을 전하십니다. “샬롬!”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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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9.21 08:3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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