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 박경옥 | 2020-09-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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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1~5절 주기도문: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사귐)처럼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리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외우는 마태, 누가 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과는 때와 장소가 다른 시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주기도문은 16장 32절의 말씀대로 혼자 남아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끝내는 십자가에 유기될 상황에서 드린 기도이며 이어지는 18장에서 바로 동산에 들어가 거기서 가룟 유다를 만나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드려진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이 기도로 보아 마가복음 14장 35,36절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께 드린 짧은 기도 내용의 간절하고 길게 구체적으로 쓰여진 내용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남겨져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이 기도를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17장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인 1~5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하나됨의 관점에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기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주 친숙한 가족으로, 낳으시고 기르셔서 현재의 나로 있게 해주신 부모님으로 부르심으로 신(神)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행위에 정의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시며 조금의 부족함에도 벌을 내리기 위해 판단과 정죄와 심판하는 무지막지한 신이 아니라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부모님, 행여 잘못될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부모님, 친숙하고 자애로우며 어느 순간에도 의지할 수 있는 부모님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 높이 멀리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가 되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과는 다르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로 시작하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바로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이 상황은 바로 앞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는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신 것입니다. 혼자 남겨지고 버려지고 유기된, 죽음을 앞둔,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서 하늘을 보셨기에 16장 32절의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내가 하려던 일이 완전히 멈추어 버려도,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혼자 있는 외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33절의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때는 죽음의 시간처럼 보였지만 승리의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패배의 자리가 아닌 영화로운 것으로 바라보는 그 시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일치는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연합은 고난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땅에서 죽음을 앞둔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보고 하늘의 아버지는 함께 아파하며 홀로 남겨진 아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마주치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역을 시행하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자신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의도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의도에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사람에 대한 간절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요한복음 1장에서 나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또 같은 단어가 에베소서 1:21에 쓰이고 있는데 이 권세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는 권세로 인간에게만 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6장 19절, 시편 136편 25절에서의 권세로서 모든 창조물에 대한 권세를 위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회복되는 것은 인간과 관련된 영역만이 아닙니다.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예수님은 창조의 때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주시려고 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궁극적인 영생은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생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지적 작용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아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식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이 모든 구원 사역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도모하셨음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서 두 분이 함께 하는 공동의 구원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가 되어 진행되고 구현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그 사람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구원사역을 이해하고 동참하고 있다는 총체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2: 14과 아모스5:4에서 알려하고 찾는 것이 구원과 관련있다고 말합니다.
33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청년이 인생의 덧없음이 아닌 영생을 말하고 또 창조의 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도 영원한 비전을 가진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만큼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 인생 너머의 처음과 나중, 그리고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을 품에 안은 신앙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서로 영화롭게 하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화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4절이 단서를 제공합니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완료형 시제는 히브리적으로 복합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 십자가 사역이 지금 당장은 수치지만 앞으로 회복하실 그 구원의 과정은 영광의 과정이 되었다는 완료형의 확신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모두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요? 이제 시작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굳은 의지를 통해 진행되고 있으며 또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에 함께하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는데 우리는 그 신비 자체를 알기 보다는 공동체적 존재방식의 신비를 우리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교회 너머 사회 공동체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역의 권세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드러났으니 모든 영역에서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를 일상에서 이루어가며 영화롭게 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공동체인 가족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의 물리적인 거리가 심리적 거리나 관심의 거리, 더 나아가 영적 거리를 더 벌리고 훼방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증명하여 보이는 우리 언덕이 되길 바랍니다. |
댓글 1
박창훈 2020.9.29 21:54
고맙습니다. 늘.